페드로 알모도바르 감독 영화에서 색채가 말하는 것

알모도바르색채

🎬 퇴직하고 나서야 제대로 보이기 시작한 것들

30년 직장 다니면서 영화를 참 많이 봤다고 생각했습니다. 퇴근하고 지쳐서 소파에 누워 틀어놓는 식이었지만요. 근데 막상 퇴직하고 나니까, 그때 내가 영화를 “본” 게 아니라 그냥 “틀어놓은” 거였다는 걸 알겠더라고요. 이제는 시간이 많으니까 같은 장면을 두 번, 세 번 돌려보기도 하고, 감독이 왜 이 장면에서 이 색을 썼는지 같은 걸 생각하면서 보게 됩니다.

그러다가 알모도바르 감독 영화를 다시 보게 됐습니다. 오래전에 한 번 봤던 작품을 다시 꺼내 봤는데, 이번엔 뭔가 달랐습니다. 색깔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거든요. 단순히 “색이 화려하다”가 아니라, 이 색이 지금 이 장면에서 뭔가를 말하고 있다는 느낌. 그게 좀 충격이었습니다. 그래서 알모도바르 초기작들이랑 최근작들을 비교하면서 다시 쭉 봤고, 오늘은 그 이야기를 해보려 합니다.

🔴 알모도바르 초기작 — 색이 터져 나오는 시절

알모도바르 감독을 처음 접하신 분이라면 아마 강렬한 빨강, 분홍, 노랑에 먼저 압도될 겁니다. 제 기억이 맞다면, 제가 처음 그의 영화를 봤을 때 솔직히 “이거 뭔가 과하다”는 생각을 먼저 했습니다. 직장 다니던 시절 취향이란 게 워낙 할리우드 영화 위주였으니까요.

근데 초기작들을 다시 보면서 느낀 건, 그 색들이 단순히 스타일을 위한 게 아니라는 겁니다. 강렬한 빨강은 거의 언제나 욕망이나 분노, 또는 억눌린 감정과 함께 등장합니다. 주인공이 극한의 감정 상태에 놓일 때, 그 방의 벽이 빨간색이거나, 입고 있는 옷이 빨간색이거나, 화면 한쪽을 강한 붉은 톤이 채우고 있습니다. 처음엔 몰랐는데, 몇 편을 연달아 보고 나니까 그게 보이기 시작하더라고요.

분홍색도 마찬가지입니다. 알모도바르 영화에서 분홍은 그냥 예쁜 색이 아닙니다. 뭔가 아슬아슬한 감정, 완전히 행복하지도 않고 완전히 슬프지도 않은 그 중간 어딘가에 있는 인물들에게 분홍이 따라다닙니다. 퇴직하고 나서 제 자신도 그런 감정 상태에 꽤 오래 있었거든요. 그래서인지 그 분홍이 예전보다 훨씬 가깝게 느껴졌습니다.

초기작의 색은 한마디로 말하면 감정이 억제되지 않고 그냥 화면 밖으로 쏟아지는 느낌입니다. 절제라는 게 없습니다. 인물들도 그렇고 색도 그렇고, 다 넘칩니다. 그리고 신기하게도, 그 과함이 오히려 스페인 특유의 어떤 정서랑 맞닿아 있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정확하진 않지만, 플라멩코 같은 예술이 가진 그 극적인 감정 표출과 비슷한 계통이 아닐까 싶더라고요.

🤍 알모도바르 최근작 — 색이 조용해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최근작들을 보면 분위기가 꽤 다릅니다. 확실히 다릅니다. 색이 사라진 건 아닌데, 훨씬 절제되어 있습니다. 강렬한 원색 대신 좀 더 가라앉은 톤, 흰색이나 베이지, 차분한 파란 계열이 많이 등장하고요. 처음엔 “감독이 나이 들면서 취향이 바뀐 건가?” 정도로 생각했습니다.

근데 계속 보다 보니 그게 아닌 것 같았습니다. 색이 줄어든 게 아니라, 색의 역할이 달라진 겁니다. 초기작에서 색이 감정을 표현했다면, 최근작에서 색은 감정을 감추거나 버티는 역할을 합니다. 흰 벽 앞에 서 있는 인물, 아무것도 꾸미지 않은 공간. 근데 그 텅 빈 공간이 오히려 더 많은 말을 하고 있습니다.

저는 이게 꽤 인상 깊었습니다. 30년 직장 생활을 마치고 퇴직한 직후, 집에 혼자 앉아 있으면 아무것도 없는 방이 오히려 가장 시끄럽게 느껴지는 그 경험이랑 어딘가 비슷했거든요. 색을 다 빼고 나서야 비로소 드러나는 것들. 알모도바르 최근작이 딱 그 느낌이었습니다.

특히 눈에 띈 건 흰색의 쓰임새입니다. 최근작에서 흰색은 단순한 배경이 아닙니다. 인물이 뭔가를 잃었을 때, 혹은 오래 억눌렀던 것들을 조용히 받아들이기 시작할 때, 흰색이 천천히 화면을 덮어옵니다. 말로 설명하기보단 그냥 봐야 느낄 수 있는 것들인데, 한번 보이기 시작하면 그 다음부턴 계속 보입니다.

✏️ 두 시기를 비교해서 보고 나서 달라진 것들

솔직히 말씀드리면, 처음엔 비교해서 보는 게 좀 힘들었습니다. 초기작이랑 최근작 사이 간격이 꽤 있으니까, 연결이 잘 안 됐거든요. “이게 같은 감독 영화 맞나?” 싶기도 했고요. 사실 저도 처음엔 초기작의 그 화려함이 더 좋았습니다. 직관적으로 와닿으니까요.

근데 최근작을 두세 번 보고, 다시 초기작으로 돌아오니까 이번엔 초기작이 다르게 보였습니다. 그 강렬한 빨강이 단순한 선택이 아니라, 그 시절 알모도바르가 세상을 향해 소리를 지르고 있었던 거라는 게 느껴졌습니다. 최근작의 절제된 색을 경험하고 나서야 초기작의 색이 얼마나 절박한 외침이었는지 보이더라고요.

이게 제가 이번에 가장 크게 느낀 차이점입니다. 초기작의 색은 감정의 분출이고, 최근작의 색은 감정의 무게입니다. 둘 다 감정을 다루는데, 방향이 완전히 반대입니다. 폭발이냐, 침잠이냐. 그리고 그 두 가지가 합쳐져야 비로소 알모도바르라는 감독이 온전히 보이는 것 같았습니다.

아쉬운 점도 있었습니다. 최근작들은 색의 절제가 너무 강해서, 처음 보는 분이라면 알모도바르 특유의 매력을 잘 못 느낄 수도 있겠다 싶었습니다. 처음부터 최근작으로 입문하면 “이게 왜 유명하지?” 할 수도 있거든요. 그리고 초기작은 반대로, 시각적 자극이 너무 강해서 이야기 안에 있는 섬세한 감정선을 놓치기 쉽습니다. 저도 직장 다닐 때 봤을 때 그냥 화려한 영화로만 기억했으니까요. 둘 다 진입 장벽이 있다면 있는 겁니다. 방향은 반대지만요.

🎨 어떤 분께 초기작이 맞는지, 어떤 분께 최근작이 맞는지

이건 제 개인적인 생각이라 다를 수 있습니다만, 나름대로 정리를 해봤습니다.

  • 초기작이 잘 맞는 분: 지금 뭔가 억눌려 있는 감정이 있는 분, 일상이 단조롭고 자극이 필요하다고 느끼는 분, 영화가 좀 과하게 느껴지더라도 에너지를 받고 싶은 분. 화면이 폭발하는 것처럼 느껴져도 그게 오히려 카타르시스가 됩니다.
  • 최근작이 잘 맞는 분: 뭔가 큰 변화를 겪고 나서 조용히 앉아 있고 싶은 분, 말 없이도 많은 걸 느끼고 싶은 분, 나이가 좀 들면서 감정이 겉으로 드러나기보단 안으로 쌓이는 걸 경험하고 있는 분. 저처럼 퇴직 후 조용한 일상을 보내면서 내면을 들여다보는 시간이 많아진 분에게 특히 맞을 것 같습니다.

가장 이상적인 건, 초기작 몇 편 보고 나서 최근작을 보는 겁니다. 순서가 중요합니다. 반대로 가면 최근작이 좀 건조하게 느껴질 수 있으니까요.

🌅 마무리하면서

퇴직하고 처음 몇 달은 솔직히 뭘 해야 할지 몰라서 무작정 영화만 봤습니다. 그냥 시간을 채우는 방법으로요. 근데 알모도바르 영화들을 비교해서 보면서부터는, 영화가 시간을 채우는 게 아니라 생각을 채워주는 것이 됐습니다.

색 하나가 이렇게 많은 말을 한다는 걸, 나이 오십 넘어서 퇴직하고 나서야 알았습니다. 조금 늦은 것 같기도 하지만, 그게 또 이 나이에 영화 보는 재미이기도 합니다. 직장 다닐 때 그냥 흘려보냈던 장면들이, 이제는 하나하나 말을 걸어오는 느낌이거든요.

알모도바르 영화 아직 안 보신 분이 계시다면, 한번쯤 색에 집중해서 보시길 권해드립니다. 이야기보다 색을 먼저 따라가 보세요. 그러면 이 감독이 화면에 무엇을 숨겨두었는지 조금씩 보이기 시작할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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