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퇴직하고 나서야 제대로 보게 된 영화들
30년 직장 생활을 마치고 나서, 저한테 제일 먼저 생긴 습관이 하나 있습니다. 오전에 커피 한 잔 내려놓고, 소파에 앉아서 영화를 보는 겁니다. 예전엔 주말에도 쉽게 못 했던 일이거든요. 회사 생각, 월요일 걱정, 밀린 보고서 생각에 영화를 봐도 절반은 딴 데 가 있었으니까요.
근데 퇴직하고 나서 처음으로 영화를 끝까지, 정말 온전히 보게 됐습니다. 그러다가 자연스럽게 예전에 봤던 영화들을 다시 꺼내 보기 시작했어요. 그중에서 제 머릿속에 계속 걸려 있던 게 바로 박찬욱 감독의 복수 3부작이었습니다.
처음 이 영화들을 봤을 때는 솔직히 말하면, 좀 불편했습니다. 화면이 충격적이고, 뭔가 너무 어둡고, 보고 나서 기분이 좋질 않았어요. 그냥 자극적인 영화라고 생각하고 덮어뒀던 것 같습니다. 근데 이번에 다시 보니까, 완전히 다른 영화더라고요. 이게 이 글을 쓰게 된 계기입니다. 나이가 들어서 다시 보니까 보이는 게 달라지는 영화가 있더라는 것, 그걸 한번 이야기해 보고 싶었습니다.
복수 3부작이라는 게, 제 기억이 맞다면, 세 편이 직접적인 연결 스토리는 아닙니다. 다만 ‘복수’라는 감정을 중심으로 묶인 작품들이에요. 오늘은 이 세 편 중에서 첫 번째 작품인 복수는 나의 것과, 아마 가장 많은 분들이 알고 계실 올드보이를 중심으로 이야기해 보려 합니다. 이 둘은 같은 감독, 같은 주제 의식 아래 만들어졌지만, 보는 감각이나 느낌이 꽤 다르거든요.
🩶 복수는 나의 것 — 소리 없이 무너지는 이야기
이 영화를 처음 봤을 때, 저는 별로였습니다. 진짜로요. 사실 저도 처음엔 뭐가 좋다는 건지 몰랐어요. 대사도 별로 없고, 뭔가 느릿느릿하고, 음악도 거의 안 나오고. 지루하다고 생각했던 것 같아요.
근데 이번에 다시 보니까, 그 ‘없음’이 전부였습니다.
이야기는 간단합니다. 청각 장애를 가진 청년이 신장이 필요한 누나를 위해 어떻게든 이식 수술을 받게 해주려고 애씁니다. 그 과정에서 일이 꼬이고, 꼬이고, 또 꼬입니다. 결국 누구도 원하지 않았던 방향으로 모든 게 흘러가 버려요.
이 영화의 가장 큰 특징은 ‘감정을 설명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주인공이 울지 않아요. 화를 내지도 않아요. 그냥 상황이 펼쳐지고, 관객이 알아서 느껴야 합니다. 저는 직장 생활 하면서 가족한테 너무 무심했던 시간들이 있었거든요. 다들 그렇잖아요, 바쁘다는 이유로. 근데 이 영화를 다시 보면서, 주인공이 누나를 살리려고 발버둥치는 장면들이 예전과 다르게 들어왔습니다. 그 절박함이 이번엔 보이더라고요. 뭔가 가슴 쪽이 묵직해졌습니다.
또 하나, 이 영화는 ‘악인이 없는 비극’이라는 점이 독특합니다. 누가 나쁜 사람이 아닌데도 끔찍한 일이 벌어집니다. 이게 저한테는 제일 무섭게 느껴졌어요. 직장 생활하면서 나쁜 의도 없이 누군가를 힘들게 했던 기억들이 있거든요. 그 감각이 이 영화랑 묘하게 겹쳤습니다.
아쉬웠던 점
솔직히 말하면, 이 영화는 처음 보는 분한테는 진입 장벽이 꽤 있습니다. 서사가 친절하지 않아요. 장면과 장면 사이를 관객이 채워야 하는 부분이 많고, 템포도 느립니다. 정확하진 않지만, 처음 봤을 때 저도 중간에 딴짓을 했던 것 같아요. 다시 보니까 그 모든 장면에 다 이유가 있었는데, 첫 번째 관람에서는 그게 잘 안 보이더라고요.
🔦 올드보이 — 알면서도 멈출 수 없는 이야기
반면에 올드보이는 다릅니다. 이건 처음 봤을 때도 잊히지 않는 영화였습니다. 아마 이 글을 읽는 분들 중에도 한 번쯤은 보셨거나, 이름은 들어보신 분들이 많을 거라 생각합니다.
이유 없이 15년 동안 감금당한 남자가 있습니다. 어느 날 갑자기 풀려나고, 그는 왜 갇혔는지를 추적합니다. 여기까지만 들으면 평범한 스릴러 같아 보입니다. 근데 이 영화가 무서운 건, 진실을 향해 달려가면 달려갈수록 차라리 몰랐으면 좋았겠다는 생각이 드는 구조라는 겁니다.
복수는 나의 것이 ‘소리 없이 무너지는 이야기’라면, 올드보이는 ‘달리다가 절벽을 만나는 이야기’입니다. 속도감이 있고, 장면 하나하나가 강렬하고, 관객을 끌고 다니는 힘이 있습니다. 유명한 복도 격투 장면은 제 기억이 맞다면 컷 편집 없이 촬영한 걸로 알고 있는데, 그 장면 하나만으로도 이 영화를 기억할 이유가 충분합니다.
이번에 다시 보면서 저한테 제일 강하게 남은 건, 최민식 배우의 눈빛이었습니다. 말보다 눈으로 다 하는 배우라는 걸, 이번에 더 실감했습니다. 30년 직장 생활하면서 사람을 꽤 봤다고 생각하는데, 그래도 그 눈빛은 설명하기가 어렵습니다. 뭔가 짐승 같으면서도, 동시에 무척 인간적인 눈빛이에요.
그리고 이 영화의 결말은, 다시 봐도 여전히 충격적입니다. 두 번째로 봐도 충격이라는 게, 그게 단순한 자극이 아니라 진짜 이야기의 힘이라는 증거 아닐까요.
아쉬웠던 점
올드보이의 단점을 꼽자면, 너무 ‘강렬함’에 기대는 면이 있습니다. 시각적으로 자극적인 장면들 덕분에, 영화가 가진 진짜 감정선이 가려지는 순간들이 있어요. 처음 보는 분들은 그 충격에 압도돼서, 영화가 무엇을 말하려는지 놓치기 쉽습니다. 저도 처음엔 그냥 이상하고 강한 영화다 싶었으니까요.
📽️ 두 편을 다시 보고 나서 느낀 차이
복수는 나의 것과 올드보이. 둘 다 복수를 다루는데, 복수가 다가오는 방식이 완전히 다릅니다.
- 복수는 나의 것은 복수가 허무합니다. 복수를 해도, 아무것도 돌아오지 않습니다. 그 허무함이 오래 남습니다.
- 올드보이는 복수 자체가 덫입니다. 복수하려는 자가 이미 누군가의 계획 안에 있다는 구조. 내가 달리는 게 아니라 달리게 조종당한다는 감각.
나이가 들고 나서 이 차이가 더 잘 보이더라고요. 젊을 때는 강렬한 쪽이 더 잘 들어왔는데, 지금은 조용하고 느린 쪽의 무게감이 더 오래 남습니다. 이건 나이 든 분들이라면 공감하실 거라 생각합니다.
🎯 어떤 분께 어느 영화가 맞을까요
복수는 나의 것은, 지금 뭔가 힘들고 지쳐 있는데 그걸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분께 권하고 싶습니다. 이 영화는 설명하지 않아요. 그냥 옆에 있어 줍니다. 외롭거나, 후회가 많거나, 돌이킬 수 없는 뭔가를 안고 살아가는 분이라면 이 영화가 뭔가를 건드릴 겁니다.
올드보이는, 이야기의 힘을 좋아하는 분께 권합니다. 퍼즐처럼 맞춰지는 서사를 즐기는 분, 아니면 오랜만에 진짜 압도되는 경험을 하고 싶은 분이라면 이 영화입니다. 단, 심리적으로 여유가 있을 때 봐야 합니다. 피곤한 날 보면 너무 무겁습니다.
두 편 다 처음 보는 분이라면, 저는 올드보이를 먼저 보시길 권합니다. 일단 영화에 잡아끄는 힘이 있어서, 이 감독의 세계로 들어오는 문으로는 올드보이가 더 자연스럽습니다. 그다음에 복수는 나의 것을 보시면, 같은 감독인데 이렇게도 다른 영화를 만들 수 있구나 싶은 감탄이 나올 겁니다.
✍️ 마무리하면서
박찬욱 감독의 영화를 다시 보면서 제가 느낀 건, 영화는 나이 들어서 보면 달라진다는 겁니다. 젊을 때 별로였던 영화가 지금은 명작이고, 젊을 때 좋아했던 영화가 지금은 좀 밋밋하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인생 경험이 쌓이면, 영화가 다르게 읽히는 것 같습니다.
복수 3부작은 불편한 영화들입니다. 보고 나서 후련하거나 기분 좋아지는 영화가 아니에요. 근데 그 불편함이 오래 남고, 그 오래 남는 게 자꾸 생각나게 만듭니다. 이 나이에 그런 영화를 만나는 것도, 꽤 소중한 일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오늘도 커피 한 잔 내려놓고 소파에 앉아서, 이 글을 쓴 다음에는 세 번째 작품인 친절한 금자씨를 다시 볼 생각입니다. 세 편 다 보고 나면, 또 이야기 나눠볼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