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릴 스트립이 매번 다른 사람이 되는 이유

메릴스트립연기

🎬 메릴 스트립이 매번 다른 사람이 되는 이유

퇴직하고 나서 제일 먼저 한 일이 뭔지 아십니까. 밀린 영화 목록 정리였습니다. 직장 다닐 때는 “이거 나중에 꼭 봐야지” 하고 메모만 해두고 결국 못 본 영화들이 수십 편이었습니다. 그 목록을 펼쳐놓고 커피 한 잔 끓여서 소파에 앉았는데, 그날 첫 번째로 꺼내 든 게 메릴 스트립 영화였습니다. 뭔가 제대로 된 거 보고 싶었거든요. 30년 넘게 책상 앞에 앉아 있다가 드디어 내 시간이 생겼으니까, 아무 영화나 틀고 싶지 않았습니다.

근데 그게 시작이었습니다. 그날 이후로 메릴 스트립 영화를 거의 다 찾아봤습니다. 제 기억이 맞다면 한 달 좀 넘게 걸린 것 같습니다. 보면 볼수록 이상한 기분이 들었습니다. 같은 배우인데 영화마다 완전히 다른 사람 같았으니까요. 그게 신기해서 이 글을 쓰게 됐습니다.

🎭 막상 보고 나니, 처음 생각이랑 달랐습니다

솔직히 처음엔 저도 메릴 스트립을 그냥 “상 많이 받은 나이 든 배우” 정도로만 알고 있었습니다. 뉴스에서 이름이 자주 나오니까 유명한 줄은 알았는데, 직접 영화를 줄줄이 보기 전까지는 왜 이 사람이 특별한지 피부로 못 느꼈던 겁니다. 사실 저도 처음엔 “유명하니까 유명한 거겠지” 하고 약간 삐딱하게 봤습니다.

근데 막상 여러 편을 연달아 보고 나니까 생각이 확 바뀌었습니다.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에서의 냉정한 편집장, 철의 여인에서의 마거릿 대처, 맘마미아에서 노래 부르는 엄마, 어댑테이션에서 난초에 집착하는 여자까지. 이게 전부 한 사람이라는 게 믿기지 않았습니다. 목소리가 달랐고, 걷는 방식이 달랐고, 눈빛이 달랐습니다. 저처럼 평생 사람을 상대하며 일해온 사람 눈에도 그 차이가 확실히 보였습니다.

제가 30년 동안 영업직에 있었습니다. 사람 표정이나 말투 보는 눈은 좀 있다고 생각했는데, 메릴 스트립은 제가 읽으려 해도 읽히지 않았습니다. 그냥 그 인물이었거든요. 배우를 보는 게 아니라 진짜 그 사람을 보는 것 같았습니다. 그게 가장 큰 충격이었습니다.

✨ 좋았던 점, 이건 진짜 놀라웠습니다

제가 느낀 메릴 스트립만의 특별함은 크게 세 가지였습니다.

  • 몸 전체로 다른 사람이 됩니다. 얼굴 표정만 바꾸는 배우들이 많습니다. 근데 메릴 스트립은 다릅니다. 마거릿 대처를 연기할 때는 턱을 살짝 들고 어깨를 고정시키는 방식이 달랐습니다. 철의 여인 특유의 그 딱딱한 품위가 몸에서 나왔습니다. 제 기억이 맞다면 그 영화를 보면서 한 번도 “아 이게 메릴 스트립이구나”라는 생각을 못 했습니다.
  • 악센트와 언어를 무기로 씁니다. 정확하진 않지만 그녀가 영화마다 다른 억양을 구현하기 위해 수개월씩 따로 훈련을 받는다고 들었습니다. 소피의 선택에서 쓴 폴란드식 영어 억양은 그야말로 압권이었습니다. 흉내 내는 수준이 아니라, 그 억양 자체가 그 인물의 슬픔을 담고 있었습니다.
  • 감정을 설명하지 않습니다. 젊은 배우들 영화 보면 감정을 너무 설명합니다. 슬프면 울고, 화나면 소리 지릅니다. 메릴 스트립은 다릅니다.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에서 딸들 사진을 보는 장면 기억하십니까. 대사 하나 없이 눈빛 하나로 그 인물의 외로움이 다 보였습니다. 그 장면 보고 잠깐 멍하니 있었습니다.

퇴직하고 나서야 이런 걸 제대로 보게 됐다는 게 좀 억울하기도 했습니다. 직장 다닐 때는 영화를 너무 가볍게 봤던 것 같습니다.

😅 아쉬웠던 점도 있었습니다, 솔직히 말하면

그렇다고 메릴 스트립의 모든 작품이 다 좋았냐. 그건 아닙니다. 솔직하게 말하겠습니다.

일단 맘마미아 시리즈는 조금 힘들었습니다. 노래 자체야 신나고 좋은데, 뮤지컬 영화 특유의 과장된 감정 표현이 저한테는 안 맞았습니다. 메릴 스트립이 열심히 하는 건 보이는데, 이 포맷 자체가 제 취향이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젊은 사람들이 왜 그렇게 좋아하는지는 이해하겠는데, 저한테는 좀 붕 뜬 느낌이었습니다.

또 하나는, 워낙 연기가 압도적이다 보니 영화 자체보다 메릴 스트립만 남는 경우가 있었습니다. 이건 좋은 것 같으면서도 묘하게 아쉬운 부분이었습니다. 같이 나오는 배우들이 상대적으로 너무 작아 보이는 거죠. 앙상블 연기를 봐야 하는 영화인데 혼자 스크린을 다 가져가버리는 느낌. 이건 메릴 스트립 탓이라기보다는 캐스팅 문제일 수도 있는데, 보는 입장에선 가끔 그게 불균형하게 느껴질 때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완전히 개인적인 이야기인데, 소피의 선택은 혼자 보지 마십시오. 감당이 안 됩니다. 저 그날 저녁 아내한테 전화 한 통 했습니다. 그냥 목소리 듣고 싶어서요. 그 영화는 너무 무거웠습니다.

❓ 자주 받는 질문들, 제가 대신 답해 봅니다

Q. 메릴 스트립 영화, 어디서 시작하면 좋을까요?

처음이라면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부터 보시길 권합니다. 부담 없이 볼 수 있고, 메릴 스트립이 얼마나 무서운 존재감을 가진 배우인지 바로 체감할 수 있습니다. 그다음엔 철의 여인, 그리고 소피의 선택 순서로 가시면 될 것 같습니다. 소피의 선택은 마음 준비하고 보셔야 합니다.

Q. 연기가 좋다는 건 알겠는데, 뭐가 다른 건지 모르겠어요

저도 처음엔 그랬습니다. 한 편만 보면 모릅니다. 두세 편을 연달아 보면 갑자기 보입니다. “아, 이 사람은 매번 다른 사람이 되고 있구나.” 비교해서 봐야 그 차이가 드러납니다. 특히 말하는 속도, 시선 처리, 침묵을 쓰는 방식을 유심히 보시면 좋습니다.

Q. 나이 든 영화들인데 지금 봐도 재미있을까요?

저처럼 오십 대 넘어서 보면 오히려 더 잘 보입니다. 젊을 때 보면 그냥 지나쳤을 장면들, 중년이 되고 나면 다르게 보이거든요. 특히 소피의 선택이나 어댑테이션 같은 작품들은 인생 경험이 쌓인 사람일수록 더 깊이 들어오는 것 같습니다. 늦게 보는 게 꼭 손해는 아닙니다.

🪑 마무리하면서

퇴직하고 나서 가장 잘한 일 중 하나가 메릴 스트립 영화를 몰아서 본 것이었습니다. 그냥 시간 때우려고 시작했는데, 어느 순간 “연기한다는 게 뭔가”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하게 됐습니다. 30년 직장생활 하면서 저도 어떤 의미에선 역할을 연기했던 것 같거든요. 팀장 역할, 아버지 역할, 남편 역할. 근데 메릴 스트립처럼 그 역할에 완전히 녹아드는 사람은 드물지 않습니까.

이 배우가 매번 다른 사람이 될 수 있는 건 재능 때문만은 아닌 것 같습니다. 준비하는 방식, 인물을 이해하려는 태도, 그리고 뭔가를 내려놓는 용기. 그런 것들이 합쳐진 결과인 것 같습니다. 정확하진 않지만, 그 고집스러운 준비가 매 작품마다 쌓여서 지금의 메릴 스트립이 된 게 아닌가 싶습니다.

시간 여유 있는 분들, 특히 저처럼 은퇴 후 조용히 뭔가 제대로 된 걸 보고 싶은 분들께 강력하게 권합니다. 한 편으로 끝나지 않을 겁니다. 그게 이 배우의 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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