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이 만든 인간의 본성에 대한 질문

구로사와 아키라

🎬 퇴직하고 나서야 제대로 마주한 구로사와 아키라

퇴직하고 나서 처음 몇 달은 솔직히 뭘 해야 할지 몰랐습니다. 30년을 회사 시간표대로 살다 보니, 갑자기 하루가 통째로 내 것이 되니까 오히려 어색했습니다. 그러다 자연스럽게 영화를 보기 시작했는데, 처음엔 요즘 나오는 블록버스터들 위주로 봤습니다. 근데 막상 보고 나면 뭔가 허전한 느낌이 있었습니다. 화면은 화려한데, 마음속에 남는 게 없는 느낌이랄까요. 그러던 어느 날 오래된 친구 한 명이 “너 구로사와 아키라 봤어?”라고 물어봤습니다. 저는 이름은 알고 있었습니다. 세계적인 거장이라는 건 어렴풋이 알고 있었지만, 솔직히 흑백 영화는 좀 지루할 것 같다는 선입견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한동안 미뤄뒀습니다. 이 글을 쓰게 된 건 결국 그 선입견이 완전히 무너진 날 이후부터입니다.

🖥️ 처음 틀었을 때, 솔직히 30분은 버텼습니다

처음 본 작품은 라쇼몽이었습니다. 제 기억이 맞다면 친구가 “이것부터 봐야 한다”고 강력하게 추천했던 것 같습니다. 화면을 틀고 나서 처음 10분은 좋았습니다. 빗소리, 폐허가 된 문, 음산한 분위기. 근데 20분쯤 지나니까 솔직히 좀 지루했습니다. 흑백이라 눈이 피로하기도 했고, 대사 전달 방식이 지금 영화랑 많이 달랐습니다. 잠깐 폰을 들었다가, 다시 뒀습니다. 그게 다행이었습니다.

30분쯤부터 이야기가 제대로 돌아가기 시작하면서 뭔가 이상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같은 사건을 각기 다른 사람이 다르게 기억하고, 다르게 말하고, 다르게 해석합니다. 살인 사건이라는 하나의 사실을 두고 네 명이 전부 다른 이야기를 합니다. 저는 처음엔 “그래서 누가 진짜야?”라는 생각으로 봤습니다. 근데 영화가 끝났을 때, 그게 핵심이 아니었다는 걸 알았습니다. 구로사와가 던지는 질문은 “누가 거짓말을 했느냐”가 아니라 “인간은 왜 자기한테 유리하게 기억하느냐”였습니다.

30년 직장생활을 돌아보니까, 그 질문이 얼마나 정직한 질문인지 뼈저리게 알겠더라고요. 회의실에서 같은 안건을 두고 각자 다르게 기억하는 경우가 한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누군가를 탓하고, 누군가는 자기 공을 크게 말하고. 라쇼몽은 그냥 옛날 일본 영화가 아니었습니다. 직장 생활 30년의 복기였습니다.

✨ 좋았던 점 – 화면이 아니라 질문이 남습니다

구로사와 아키라의 영화가 좋은 건, 그 영화들이 끝나고 나서도 계속 생각하게 만든다는 겁니다. 요즘 영화들은 보는 동안은 재밌는데, 다음 날 되면 기억이 가물가물합니다. 근데 라쇼몽은 보고 나서 사흘쯤 머릿속에서 계속 뭔가 꿈틀거렸습니다. “나는 내 기억을 얼마나 믿을 수 있지?”라는 질문이 떠나질 않았습니다.

그 다음에 이키루도 봤습니다. 정확하진 않지만, 이건 라쇼몽보다 훨씬 조용한 영화였습니다. 죽음을 선고받은 공무원이 남은 시간 동안 자기 삶의 의미를 찾는 이야기입니다. 저도 이제 환갑을 바라보는 나이니까, 이 영화는 좀 달리 다가왔습니다. 그 주인공이 수십 년 동안 서류만 처리하다가 뒤늦게야 “내가 뭘 했나”를 깨닫는 장면에서, 저도 모르게 목이 멘 적이 있었습니다. 부끄럽지만 솔직히 말하는 겁니다.

구로사와의 진짜 힘은 인물에 있습니다. 그의 영화 속 인물들은 완벽하지 않습니다. 겁쟁이이고, 이기적이고, 허세 부리고, 거짓말합니다. 근데 그 안에서 아주 가끔 진짜 인간다운 순간이 나옵니다. 그 순간이 너무 자연스러워서, 보는 사람이 자기 자신을 그 안에서 찾게 됩니다. 그게 수십 년이 지나도 이 영화들이 살아있는 이유가 아닐까 싶습니다.

😅 아쉬웠던 점 – 진입 장벽이 생각보다 높습니다

솔직하게 말하겠습니다. 구로사와 영화는 처음 보는 사람한테 친절하지 않습니다. 러닝타임이 긴 작품들이 많고, 흑백 화면이 주는 피로감도 무시할 수 없습니다. 저처럼 요즘 영화에 익숙해진 눈에는 초반 30분이 진짜 고비였습니다. 편집 리듬도 다르고, 배우들의 연기 방식도 지금 기준으로 보면 과장되게 느껴지는 부분이 있습니다. 특히 일본 전통 연극 양식에서 나온 표현 방식들은 처음엔 어색하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그리고 자막 문제도 있습니다. 번역에 따라 의미가 꽤 달라지는 경우가 있더라고요. 제가 두 가지 버전을 비교해서 본 건 아니지만, 일본어를 모르는 상태에서 자막으로만 보면 뉘앙스를 놓치는 부분이 분명히 있겠다 싶었습니다. 이건 어쩔 수 없는 한계긴 한데, 아쉬움으로 남은 건 사실입니다.

또 하나. 처음부터 대표작을 보려고 하면 오히려 역효과가 날 수 있습니다. 저처럼 선입견 없이 한 편 틀었다가 초반에 꺼버리는 경우가 생길 수 있습니다. 가능하면 누군가랑 같이 보거나, 적어도 첫 40분은 버텨야 한다는 걸 미리 알고 시작하는 게 좋습니다.

❓ 자주 받는 질문들

Q. 구로사와 영화, 어떤 것부터 봐야 할까요?

제 경험으로는 라쇼몽이나 이키루 중 하나를 먼저 보시라고 말씀드립니다. 둘 다 러닝타임이 상대적으로 짧고, 이야기 구조가 단순한 편이라 처음 보는 분들이 접근하기 좋습니다. 시대극이나 액션을 좋아하신다면 7인의 사무라이도 좋은데, 러닝타임이 꽤 깁니다. 각오하고 보셔야 합니다.

Q. 흑백 영화라 눈이 피로하지 않나요?

솔직히 처음엔 피로합니다. 저도 그랬습니다. 근데 신기하게 30분 넘어가면 흑백이라는 게 의식이 안 됩니다. 오히려 불필요한 색채 정보가 없으니 이야기에 더 집중하게 됩니다. 밝은 낮에 보는 것보다 저녁에 조명 좀 낮추고 보시면 훨씬 몰입이 잘 됩니다.

Q. 젊은 사람들도 재밌게 볼 수 있을까요?

재밌다는 표현이 어떤 의미냐에 따라 다릅니다. 자극적인 재미는 솔직히 없습니다. 근데 뭔가 묵직하게 남는 느낌, 보고 나서 한참 생각하게 되는 영화를 좋아하는 분이라면 나이 상관없이 충분히 즐길 수 있다고 봅니다. 오히려 인생 경험이 조금 쌓인 분들이 더 깊이 느끼는 경향은 있습니다만, 꼭 나이 들어야만 보이는 영화는 아닙니다.

🌿 마무리 – 인간이 이렇게 복잡한 존재였나

구로사와 아키라의 영화를 몇 편 보고 나서 제가 느낀 건 결국 하나였습니다. 인간은 참 복잡한 존재라는 겁니다. 선하지도, 악하지도 않고. 상황에 따라 비겁해지기도 하고, 예상치 못한 순간에 용감해지기도 합니다. 거짓말을 하면서도 자기가 거짓말하는 줄 모르기도 합니다. 그걸 구로사와는 판단하지 않고 그냥 보여줍니다. 그 담담함이 오히려 더 날카롭게 찔러옵니다.

퇴직하고 나서야 이 영화들을 제대로 만났다는 게, 사실 조금 아쉽기도 합니다. 30년 전에 봤다면 직장 생활을 조금은 다르게 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도 합니다. 뭐, 지금 봐도 늦지 않은 거라고 스스로를 위로하고 있습니다. 인간의 본성에 대해 질문을 던지는 영화, 한 번쯤 조용히 혼자 앉아서 보시길 권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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