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준호 감독 영화에서 반복되는 계단의 의미

봉준호계단상징

🎬 퇴직하고 나서야 보이기 시작한 것들

직장 다닐 때는 영화를 그냥 봤습니다. 눈에 담고, 웃거나 울고, 끝나면 그걸로 끝이었습니다. 30년 넘게 그렇게 살았으니까요. 근데 퇴직하고 나서 시간이 생기니까 영화 하나를 두 번, 세 번 보게 되더라고요. 그러다 이상한 걸 발견했습니다. 봉준호 감독 영화에 유독 계단이 자주 나온다는 겁니다.

처음엔 그냥 우연이려니 했습니다. 제 기억이 맞다면, 기생충을 다시 볼 때 계단 장면에서 괜히 멈추게 됐습니다. 그러다 예전에 봤던 마더, 살인의 추억, 설국열차까지 기억을 더듬어보니 계단이 없는 봉준호 영화를 오히려 떠올리기 어렵더라고요. 이게 단순히 제가 이상한 게 아닐 수도 있겠다 싶었습니다. 그래서 며칠에 걸쳐 제가 가진 DVD 몇 장을 다시 꺼내고, 스트리밍으로도 몇 편 더 보면서 정리를 해봤습니다. 오늘은 그 이야기를 해보려 합니다.

📉 아래로 내려가는 계단 — 가난과 추락의 언어

봉준호 감독 영화에서 계단은 크게 두 가지 방향으로 나뉩니다. 내려가는 계단과 올라가는 계단입니다. 먼저 내려가는 쪽 이야기를 해볼게요.

기생충에서 기택 가족이 사는 반지하 집에 들어가려면 계단을 내려가야 합니다. 영화를 보면서 그 장면이 자꾸 마음에 걸렸습니다. 사실 저도 젊었을 때 반지하에서 살아본 적이 있거든요. 입사 초봉이 워낙 적었으니까요. 그때 그 계단을 내려가던 느낌이 딱 그랬습니다. ‘나는 지금 세상에서 한 칸 내려가고 있다’는 기분. 봉준호 감독이 그걸 알고 찍은 건지, 아니면 제가 과하게 감정 이입을 한 건지 정확하진 않지만, 그 장면이 괜히 오래 남았습니다.

폭우가 쏟아지는 날 밤, 기택 가족이 달려 내려오는 그 계단은 더 강렬합니다. 비가 폭포처럼 쏟아지고, 계단이 물로 가득 차고, 가족은 그 아래로, 아래로 계속 내려갑니다. 이건 단순한 도주 장면이 아닙니다. 계층이 무너지는 장면입니다. 잠깐 위로 올라가는 척했던 삶이, 한 번의 폭우로 원래 자리 아래로 쓸려 내려가는 거잖아요. 저는 이 장면에서 숨이 막혔습니다. 영화를 보면서 그런 감각을 느낀 게 정말 오랜만이었습니다.

살인의 추억에서도 비슷한 구도가 보입니다. 용의자를 추적하는 장면, 밤 골목에서 이어지는 계단들. 그 계단들은 진실이 있을 것 같은 곳으로 이어지지 않습니다. 계속 아래로 내려가도 아무것도 없습니다. 진실이 없는 공간으로 가는 하강의 이미지, 그게 살인의 추억 전체의 정서와 딱 맞아 떨어집니다. 범인을 못 잡는 영화잖아요. 계속 내려가도 답이 없는 그 느낌.

📈 올라가는 계단 — 욕망과 허상의 언어

반대로 올라가는 계단은 또 다른 이야기를 합니다. 이쪽이 사실 더 씁쓸합니다.

기생충에서 박 사장 집으로 올라가는 계단이 있습니다. 기택 가족이 처음 그 집에 들어갈 때, 카메라가 계단을 따라 위를 올려다보는 구도를 취합니다. 넓고, 밝고, 아름다운 계단입니다. 그런데 그 계단을 올라갈수록 기택 가족은 점점 자기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이 됩니다. 가짜 이름을 쓰고, 가짜 이력서를 내고, 가짜 관계를 맺습니다. 올라가면 올라갈수록 진짜 자신은 사라지는 거예요.

저도 직장생활을 오래 하면서 비슷한 경험이 있습니다. 직급이 올라갈수록 진짜 내 말을 하기 어려워지더라고요. 위로 올라가는 게 꼭 좋은 건 아니라는 거, 몸으로 알고 있었는데, 봉준호 감독이 그걸 계단으로 보여주고 있었던 겁니다. 처음 봤을 땐 그냥 예쁜 집 계단이라고만 생각했었는데, 다시 보니 그게 다 읽히더라고요.

설국열차에서는 아예 계단이 아니라 칸을 이동하는 구조지만, 앞으로 나아가면 나아갈수록 상위 계층의 공간이 나오는 방식이 세로형 계단을 가로로 눕혀놓은 것과 같습니다. 앞으로 가는 게 곧 위로 올라가는 것이고, 그 끝엔 뭐가 있냐면, 결국 시스템 그 자체입니다. 그 시스템을 부수지 않으면 아무리 올라가도 의미가 없다는 거, 커티스가 가장 나중에 깨닫잖아요. 올라가는 계단 위에 있는 게 항상 구원은 아니라는 메시지, 봉준호 감독이 집요하게 반복하는 주제입니다.

🤔 직접 비교해보고 나서 느낀 점 — 방향이 아니라 ‘누가 보는가’가 다르다

처음엔 단순하게 내려가는 계단은 나쁜 것, 올라가는 계단은 좋은 것이라고 나눠보려 했습니다. 근데 막상 장면들을 다시 하나하나 보니까 그렇게 단순하지 않았습니다. 봉준호 감독이 쓰는 계단의 진짜 핵심은 방향이 아니라, 그 계단을 누가 어떤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느냐에 있었습니다.

내려가는 계단을 빠르게 달려 내려가는 사람은 쫓기는 사람입니다. 선택의 여지가 없습니다. 반면 올라가는 계단을 천천히 오르는 사람은 뭔가를 얻으려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봉준호 감독은 그 올라가는 사람을 절대 영웅적으로 찍지 않습니다. 카메라가 항상 약간 비틀려 있거나, 그림자가 함께 따라오거나, 올라가면 올라갈수록 표정이 불안해지거나 합니다.

제가 이걸 깨달은 게 꽤 늦었습니다. 솔직히 기생충을 처음 봤을 때는 그냥 재밌는 스릴러라고 생각했습니다. 계단에 이런 의미가 있을 거라곤 전혀 몰랐습니다. 두 번째 볼 때도 반신반의했습니다. 세 번을 보고 나서야 ‘아, 이 감독은 계단을 공간으로 쓰는 게 아니라 계급을 그림으로 그리는 도구로 쓰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늦게 깨달은 만큼 더 인상적이었습니다.

💬 어떤 분께 이 시선이 맞고, 어떤 분께는 과한 해석일까

사실 이런 이야기를 하면 “너무 의미 부여하는 거 아니야?”라고 할 분들도 계실 겁니다. 저도 충분히 이해합니다. 영화는 그냥 재미있으면 되는 거다, 그게 맞습니다. 굳이 계단에서 계급을 읽지 않아도 기생충은 충분히 훌륭한 영화입니다.

근데 봉준호 영화를 두 번 이상 보는 습관이 있으신 분들이라면, 이런 시선이 꽤 쓸만합니다. 장면 하나하나가 다르게 보이기 시작하거든요. 같은 장면인데 처음엔 몰랐던 게 보이는 그 쾌감, 퇴직하고 시간이 생기고 나서야 알게 된 즐거움입니다. 직장 다닐 땐 그럴 여유가 없었으니까요.

반면 영화를 처음 볼 때의 감동을 소중하게 여기시는 분들께는 이 글이 오히려 방해가 될 수도 있습니다. 너무 뜯어보다 보면 영화 자체의 감흥이 줄어드는 경우도 있거든요. 그건 각자가 선택하시면 됩니다. 영화 보는 방법에 정답은 없습니다.

한 가지 솔직하게 아쉬운 점을 말씀드리자면, 이런 분석을 혼자 하다 보니 확인할 방법이 마땅치 않다는 겁니다. 봉준호 감독이 직접 인터뷰에서 계단에 대해 명확하게 이야기한 내용을 제가 접한 적이 없거든요. 정확하진 않지만, 감독 본인이 의도한 것과 제가 읽어낸 것이 다를 수도 있습니다. 이건 늘 관객의 해석에는 따라붙는 한계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이 글은 분석이라기보단 한 중년 영화팬의 오랜 관찰 메모라고 봐주셨으면 합니다.

🎞️ 마무리 — 계단을 보면 감독이 보입니다

봉준호 감독 영화의 계단은 결국 하나의 질문입니다. 당신은 지금 올라가고 있습니까, 내려가고 있습니까. 그리고 그 방향이 당신이 선택한 겁니까, 아니면 선택당한 겁니까.

퇴직하고 이런 생각을 하며 오후를 보내는 게, 처음엔 좀 쓸쓸하기도 했습니다. 근데 이제는 이게 나쁘지 않습니다. 30년 동안 빠르게만 올라가려 했던 계단에서 내려와서, 이제야 계단이 뭔지 들여다보는 것 같습니다. 봉준호 감독 영화가 그 시간을 함께해줘서 고맙습니다.

다음번엔 봉준호 영화에서 반복되는 또 다른 장치인 ‘냄새’에 대해서도 한번 써볼까 합니다. 이것도 계단만큼이나 일관된 뭔가가 있거든요. 제 기억이 맞다면, 그것도 꽤 흥미로운 이야기가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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