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봉준호 감독 영화를 순서대로 보면 보이는 것들
퇴직하고 나서 제일 먼저 한 일이 뭔지 아십니까. OTT 서비스 세 개를 한꺼번에 구독했습니다. 30년 동안 회사 다니면서 “나중에 봐야지” 하고 미뤄뒀던 영화들이 머릿속에 줄을 서 있었거든요. 근데 막상 뭘 볼지 고르다가 하루가 다 가는 날이 허다했습니다. 그러다 어느 날 아내가 그러더라고요. “봉준호 거 다 봐봐. 어차피 시간 많잖아.” 좀 핀잔처럼 들리긴 했지만, 그 말이 계기가 됐습니다.
처음엔 그냥 유명한 감독 영화 몇 편 보는 거라고 가볍게 생각했습니다. 근데 순서대로 보기 시작하니까, 단순히 “이 영화 재밌다, 아니다”를 넘어서 뭔가 다른 게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마치 한 사람의 일기를 처음부터 읽는 느낌이랄까요. 저 같은 평범한 아저씨 눈에도 그게 느껴질 정도였으니, 영화 좀 아시는 분들은 훨씬 많은 걸 발견하실 겁니다. 오늘은 제가 직접 겪은 그 경험을 솔직하게 풀어보려고 합니다.
📽️ 왜 “순서대로”가 중요한가
사실 저도 처음엔 순서 같은 거 별로 신경 안 썼습니다. 유명한 것부터 봐야지 싶어서 기생충을 먼저 봤고, 그 다음에 옥자를 봤습니다. 그러고 나서 살인의추억을 봤는데, 어라, 뭔가 이상하다 싶었습니다. 기생충을 먼저 본 눈으로 살인의추억을 보니까 자꾸 기생충이랑 비교하면서 보게 되더라고요. 순서가 뒤바뀌니까 감독이 어떻게 성장했는지가 안 보이는 겁니다.
그래서 다시 처음부터 발표 순서대로 정주행을 했습니다. 플리킹, 단편까지 챙겨보긴 어려웠고, 장편 데뷔작부터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하니까 완전히 달랐습니다. 봉준호라는 감독이 어떤 생각을 갖고 있고, 그 생각이 작품마다 어떻게 진화했는지가 한 줄기 선처럼 연결되어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 초기작에서만 보이는 날것의 분노
플란다스의 개와 살인의추억. 이 두 편을 보면 봉준호 감독이 얼마나 사회에 대한 날것의 감정을 갖고 있는지가 바로 느껴집니다. 정제되지 않은 분노라고 해야 할까요. 살인의추억은 특히 그렇습니다. 단순히 미제 사건을 다룬 스릴러가 아니에요. 이 영화는 국가 시스템과 제도에 대한 불신을 처절하게 담고 있습니다.
제가 30년 직장생활을 하면서 느꼈던 그 답답함, 아무리 열심히 해도 벽에 막히는 느낌, 그게 영화 속 형사들한테서 보였습니다. 송강호 씨가 마지막에 카메라를 바라보는 그 장면. 제 기억이 맞다면 그 눈빛은 범인에 대한 분노가 아니라 허탈함 그 자체였습니다.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는다는. 이 감각은 후기작으로 갈수록 더 세련되게 다듬어지는데, 초기작에서는 그냥 날카롭게 튀어나옵니다. 날것 그대로.
🏠 중반작에서 보이는 “공간”에 대한 집착
괴물과 마더를 보면서 저는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이 감독은 공간을 참 무섭게 쓴다고. 괴물에서 한강 고수부지, 그 광활하고 일상적인 공간이 갑자기 공포의 무대로 바뀌는 방식. 마더에서 그 좁은 골방과 들판의 대비. 봉준호 감독은 공간 자체를 계급의 언어로 쓰기 시작한 것 같습니다.
괴물을 볼 때 저는 솔직히 말하면 처음에 좀 헷갈렸습니다. 가족 영화인가, 괴수 영화인가, 사회 비판 영화인가. 뭘 보고 싶은지 모르겠는 느낌이었어요. 근데 마더를 본 다음에 괴물을 다시 생각해보니까, 아, 이 두 영화는 결국 “국가와 제도로부터 버려진 사람들의 이야기”라는 걸 알게 됐습니다. 그 버려진 사람들이 발 딛고 있는 공간이 그걸 상징하고 있었던 겁니다. 순서대로 보지 않았으면 몰랐을 것 같습니다.
📐 후기작에서 완성되는 “수직 구조”의 미학
설국열차, 옥자, 기생충. 이 세 편을 묶어서 보면 봉준호 감독의 세계관이 하나의 그림으로 완성되는 느낌을 받습니다. 특히 수직 구조라는 게 정말 일관됩니다. 설국열차는 앞칸과 뒤칸, 기생충은 반지하와 지상 그리고 지하. 위아래로 나뉜 세계, 그리고 그 경계를 넘으려는 인간들의 이야기.
기생충을 처음 봤을 때는 솔직히 “아 이게 다 지하실로 연결되는구나” 하는 반전에 집중했습니다. 그런데 살인의추억부터 순서대로 다 보고 나서 기생충을 다시 보니까, 이 영화가 단순한 반전 스릴러가 아니라는 게 보입니다. 봉준호 감독이 초기작부터 갖고 있던 질문, “왜 어떤 사람들은 구조적으로 아래에 있을 수밖에 없는가”, 그 질문의 최종 답안지 같은 영화였습니다.
그리고 정확하진 않지만, 기생충의 그 지하 공간은 살인의추억에서 범인이 드나들던 어두운 통로와 어딘가 닮아있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제 개인적인 느낌일 수도 있지만요.
⚠️ 알아두면 좋은 점과 아쉬웠던 부분
솔직히 말씀드리면, 이 정주행이 마냥 즐거운 경험만은 아니었습니다. 몇 가지 아쉬운 점도 분명히 있었습니다.
- 마더는 보는 내내 무거웠습니다. 영화 자체가 워낙 암울한 정서를 갖고 있어서, 연속으로 보다가 이 영화에서 한 번 완전히 지쳤습니다. 중간에 며칠 쉬고 다시 봤습니다.
- 설국열차는 봉준호 필모그래피 안에서 살짝 이질적인 느낌이 있었습니다. 외국 자본, 영어 대사, 할리우드 배우들이 섞이면서 봉준호 특유의 한국적 정서가 옅어졌습니다. 아쉬웠습니다. 메시지는 뚜렷하지만, 한국 영화에서 느끼던 그 감각적인 질감이 좀 희석된 느낌이랄까요.
- 한 번에 몰아보면 주제의식이 반복되는 느낌이 들 수 있습니다. 어느 순간 “또 계급 이야기네”라는 생각이 드는 게 사실입니다. 물론 그게 이 감독의 핵심이지만, 연속으로 보다 보면 약간 피로해지는 것도 부정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니까 일주일에 한 편 정도, 간격을 두고 보시는 걸 권해드립니다. 저처럼 무리하게 몰아보다가 중간에 지치면 오히려 영화를 제대로 못 느끼게 됩니다.
🙋 이런 분들에게 특히 추천합니다
봉준호 영화 순서대로 정주행, 어떤 분들에게 맞을까요. 제가 겪어보니까 이런 분들한테 특히 잘 맞을 것 같았습니다.
- 기생충만 보고 봉준호를 다 안다고 생각하시는 분. 기생충은 결론입니다. 출발점부터 보셔야 그 결론의 무게가 다르게 느껴집니다.
- 영화를 보고 나서 뭔가 오래 생각하고 싶은 분. 봉준호 영화들은 다 본 다음에도 며칠씩 머릿속에 남습니다. 빠르게 소비하는 콘텐츠가 아니에요.
- 저처럼 퇴직 후 시간이 생긴 분, 또는 뭔가에 깊이 빠져들고 싶은 분. 이 정주행은 단순히 영화 감상이 아니라 한 사람의 세계관을 따라가는 경험에 가깝습니다. 시간이 좀 필요합니다.
- 한국 사회를 살아온 사람으로서 영화를 보고 싶은 분. 봉준호 영화 속 계급, 제도, 개인의 무력감은 교과서에서 배운 게 아니라 우리가 실제로 겪어온 것들입니다. 나이 드신 분일수록 더 깊이 공감하실 겁니다.
✍️ 마무리하며
봉준호 감독 영화를 순서대로 다 보고 나서, 저는 한동안 멍하니 앉아 있었습니다. 뭔가 긴 소설을 다 읽은 느낌이었습니다. 각각의 영화가 독립적인 작품이면서도, 전부 이어져 있다는 느낌. 그게 이 정주행의 가장 큰 보람이었습니다.
직장 다닐 때 저는 영화를 그냥 스트레스 해소 수단으로 봤습니다. 퇴직하고 나서 이렇게 한 감독의 작품을 처음부터 끝까지 들여다보는 건 처음이었습니다. 그리고 이게 꽤 좋은 경험이었습니다. 나이 쉰여덟에 영화를 이렇게 보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혹시 봉준호 영화 한두 편만 보신 분이 계시다면, 한번 처음부터 차근차근 따라가 보시길 권합니다. 유명세나 수상 이력과 상관없이, 한 사람이 평생 붙들고 있는 질문을 따라가는 경험 자체가 꽤 값진 것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