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퇴직하고 나서야 제대로 본 메릴 스트립이라는 배우
퇴직하고 나서 처음 몇 달은 솔직히 뭘 해야 할지 몰랐습니다. 30년 넘게 아침마다 넥타이 매고 나가던 사람이 갑자기 오전 열 시에 소파에 앉아 있으니까요. 처음엔 책도 읽어보고, 산책도 해봤는데 영 마음이 채워지지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자연스럽게 영화를 보기 시작했습니다. 하루에 한 편, 어떤 날은 두 편. 그게 지금은 제 하루의 중심이 되었습니다.
메릴 스트립을 처음 제대로 의식한 건, 아내가 어떤 영화를 틀어놓고 자기는 졸다가 잠들어버린 날이었습니다. 저 혼자 끝까지 봤는데, 다 보고 나서 이상하게 가슴이 먹먹했습니다. 그 배우가 메릴 스트립이라는 걸 나중에야 알았습니다. 제 기억이 맞다면 그게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였을 겁니다. 그 뒤로 이 배우 필모그래피를 하나씩 따라가기 시작했고, 어느 순간 저는 메릴 스트립의 작품들이 사실은 여성 캐릭터가 어떻게 변해왔는지를 보여주는 일종의 지도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됐습니다.
🎥 직접 한 편씩 찾아보니까 — 생각보다 훨씬 달랐습니다
처음엔 그냥 유명한 것들만 골라서 봤습니다. 인터넷에 “메릴 스트립 추천작”이라고 치면 늘 비슷한 제목들이 나오더라고요. 근데 막상 그 순서대로 보다 보니까, 시간 흐름에 따라 캐릭터의 결이 완전히 달라진다는 게 느껴졌습니다. 이게 그냥 배우의 나이 때문인가 싶었는데, 그게 아니었습니다.
초기 작품에서 메릴 스트립이 연기하는 여성들은 주로 누군가의 아내이거나, 누군가에게 상처받은 사람이거나, 주변 상황에 의해 선택지가 좁아진 사람들이었습니다. 〈크레이머 대 크레이머〉에서의 조앤이 딱 그런 인물이었습니다. 이혼하고 아이를 두고 떠나는 엄마. 사실 저 처음에 이 영화 볼 때 솔직히 말하면 조앤한테 감정 이입이 잘 안 됐습니다. 제 세대 남자가 그런 엄마를 이해하기가 쉽지 않았거든요. 근데 두 번째로 다시 봤을 때는 달리 보였습니다. 그 여자가 도망친 게 아니라, 자기 자신을 처음으로 선택한 거라는 게 느껴졌습니다. 나이 들고 나니까 그게 보이더라고요.
〈소피의 선택〉은 좀 다른 차원의 영화였습니다. 감당할 수 없는 선택을 강요당한 여자의 이야기인데, 정확하진 않지만 이 영화가 메릴 스트립에게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안겨준 작품으로 알고 있습니다. 이 영화를 보면서 저는 한참 멍하게 앉아 있었습니다. 직장 생활 내내 크고 작은 결정들을 내려온 사람으로서, 선택이라는 게 얼마나 무거운 것인지를 다시 생각하게 됐습니다. 근데 이 영화에서 소피는 결국 선택의 무게에 짓눌려 살아갑니다. 그 시절 영화에서 여성 캐릭터가 그랬습니다. 감당하고, 버티고, 무너지는 역할.
💡 그러다가 뭔가 바뀌는 지점이 생깁니다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에서 메릴 스트립이 연기한 미란다 프리스틀리는 완전히 다른 종류의 캐릭터였습니다. 이 여자는 무너지지 않습니다. 감정도 잘 드러내지 않습니다. 냉혹하고, 정확하고, 자기 세계가 뚜렷합니다. 처음 볼 때는 그냥 나쁜 상사 이야기인 줄 알았습니다. 근데 계속 보다 보면 이 캐릭터가 그 자리까지 오기 위해 얼마나 많은 걸 포기했을지가 보이기 시작합니다. 대사 몇 마디 없이 그걸 다 보여주는 게 메릴 스트립이라는 배우의 무서운 점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줄리 앤 줄리아〉에서는 또 달랐습니다. 줄리아 차일드라는 실존 인물을 연기했는데, 이 캐릭터는 뭔가 자유로웠습니다. 실패해도 괜찮고, 엉뚱해도 괜찮고, 큰 소리로 웃어도 괜찮은 여자. 저는 이 영화 보면서 처음으로 영화 속 여성 캐릭터를 보며 “저 사람처럼 살고 싶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남자인 제가요. 그게 좀 신기하기도 했습니다.
👍 좋았던 점 — 영화 한 편이 아니라 시대를 읽게 됩니다
메릴 스트립 작품들을 시간 순서대로 따라가면서 좋았던 건, 영화 자체의 재미를 넘어서 “그 시절 사람들이 여성을 어떻게 바라봤는가”가 보인다는 겁니다. 이건 누가 가르쳐준 게 아니라 그냥 보다 보니 느껴진 거였습니다.
직장 다닐 때 저는 여성 동료들이 회의실에서 발언하면 왠지 분위기가 어색해지는 걸 여러 번 봤습니다. 그 동료들이 나쁜 대우를 받았다고 생각하진 않았는데, 지금 돌아보면 그게 이미 차별이었을 수 있겠다 싶기도 합니다. 메릴 스트립의 영화들을 보면서 그런 생각들을 하게 됐습니다. 영화가 이렇게 사람을 돌아보게 만들 줄은 몰랐습니다.
또 하나 좋았던 건, 메릴 스트립이 나이 들면서 역할이 줄어드는 게 아니라 오히려 더 입체적인 캐릭터를 맡는다는 점이었습니다. 저는 그게 부러웠습니다. 솔직히. 퇴직하고 나면 사람이 뭔가 줄어드는 느낌이 드는데, 저 배우는 오히려 쌓아가는 느낌이 들더라고요. 그게 연기인지 삶인지 모르겠지만, 하여간 그랬습니다.
😕 아쉬웠던 점 — 솔직하게 말씀드리겠습니다
이렇게 좋은 배우인데 아쉬운 게 있냐고요. 있습니다. 몇 가지.
일단 작품 수가 너무 많습니다. 처음에 “다 봐야지” 했다가 중간에 지쳤습니다. 어떤 작품은 영상 자체를 구하기가 어렵기도 했고, 어떤 건 자막이 불완전해서 대사를 절반쯤 놓쳤습니다. 한국에서 스트리밍 서비스로 볼 수 있는 작품에 한계가 있다는 게 현실적인 아쉬움이었습니다.
그리고 이건 좀 개인적인 얘기인데, 초기 작품들 중 몇 개는 저한테 너무 무거웠습니다. 〈소피의 선택〉 같은 경우는 보고 나서 이틀쯤 기분이 처졌습니다. 영화가 나쁜 게 아니라, 제가 그 감정을 소화할 준비가 안 됐던 것 같습니다. 명작이라고 해서 아무 때나 꺼내 보면 안 된다는 걸 뒤늦게 알았습니다. 이 점은 특히 처음 보는 분들께 미리 말씀드리고 싶었습니다.
또 한 가지. 메릴 스트립 작품 중에서 상업적으로 유명한 것들만 자꾸 추천되다 보니, 정작 덜 알려진 작품들은 접근 자체가 어려웠습니다. 막상 찾아보면 꽤 좋은 작품들이 있는데, 그게 소개되지 않는 게 아쉬웠습니다.
❓ 자주 묻는 질문들 — 주변에서 많이 받은 것들입니다
Q. 메릴 스트립 영화, 처음 보는 사람한테 어떤 작품부터 추천하시나요?
저는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나 〈줄리 앤 줄리아〉부터 시작하시라고 말씀드립니다. 두 작품 모두 무겁지 않고, 메릴 스트립의 연기력이 충분히 느껴지면서도 보고 나서 기분이 그렇게 무겁지 않습니다. 초기 작품부터 순서대로 보려다가 지쳐서 포기하신 분들도 있더라고요. 처음엔 입문용으로 편하게 시작하시는 게 맞는 것 같습니다.
Q. 영화에 관심 없는 사람도 재미있게 볼 수 있나요?
솔직히 말씀드리면, 영화를 거의 안 보시는 분이라면 처음에 좀 낯설 수도 있습니다. 메릴 스트립 영화들이 대부분 액션이나 자극적인 요소가 적거든요. 근데 한 편만 제대로 보시면 그 다음부터는 자연스럽게 손이 가더라고요. 저도 처음엔 영화 자체에 큰 관심이 없었던 사람이었으니까요.
Q. 여성 캐릭터 이야기라면 남성 관객은 공감하기 어렵지 않나요?
저도 처음엔 그 생각을 했습니다. 근데 막상 보면 그렇지 않았습니다. 결국 이 영화들이 이야기하는 건 선택, 포기, 인정받고 싶은 마음, 자기 자신으로 살고 싶은 욕구 같은 것들인데 이건 남녀 상관없이 다 공감하는 감정이거든요. 오히려 남자인 저한테 더 새롭게 다가오는 부분들이 있었습니다. 내가 무심코 당연하게 여겼던 것들을 다시 보게 되는 경험이 있었습니다.
✍️ 마무리하며 — 영화가 사람을 조금 바꾸기도 합니다
퇴직하고 나서 제가 이렇게 영화 이야기를 길게 쓰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근데 메릴 스트립이라는 배우를 따라가다 보니까, 영화가 단순한 오락이 아니라 시대를 담는 그릇이라는 걸 조금 알게 됐습니다. 그리고 여성 캐릭터가 어떻게 그려지는지를 보면서 제 자신이 그동안 어떤 시선을 갖고 살아왔는지를 돌아보게 됐습니다. 그게 좀 불편하기도 했고, 한편으로는 좋았습니다.
이 글을 보시는 분이 저처럼 시간이 생겨서 영화를 찾고 있는 분이든, 오래전부터 영화를 사랑해온 분이든, 메릴 스트립 작품들은 한 번쯤 제대로 들여다볼 가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특히 삶에서 뭔가 선택을 앞두고 있거나, 지금 자기 자신을 잘 모르겠다 싶은 순간에 보시면 더 깊이 와닿을 것 같습니다.
저는 오늘도 소파에 앉아서 다음에 뭘 볼지 고민하고 있습니다. 나쁘지 않은 오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