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알모도바르를 처음 만났던 날
퇴직하고 나서 시간이 갑자기 너무 많아졌습니다. 30년 넘게 아침마다 넥타이 매고 나가던 사람이 어느 날 갑자기 집에 있으니까, 솔직히 처음 몇 달은 뭘 해야 할지 몰라서 멍하니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자연스럽게 영화를 많이 보게 됐습니다. 젊었을 때 바빠서 못 봤던 것들을 하나씩 찾아보는 거죠.
근데 어느 날 큰아들이 전화해서 이런 말을 하더라고요. “아버지, 유럽 영화 좋아하시면 알모도바르 한번 보세요.” 그게 다였습니다. 설명도 없이. 저는 그냥 이름 하나 받아 들고 검색을 시작했는데, 이게 생각보다 쉽지 않았습니다. 어디서부터 봐야 할지도 모르겠고, 첫 번째로 본 작품에서 당혹스러운 장면들이 나와서 잠깐 멈칫하기도 했습니다. 그 경험을 오늘 한번 솔직하게 풀어보려고 합니다. 저처럼 알모도바르를 처음 접하는 분들이 조금 덜 헤매셨으면 하는 마음으로 이 글을 씁니다.
🌹 막상 처음 봤을 때, 예상과 많이 달랐습니다
저는 처음에 알모도바르가 그냥 유명한 유럽 감독이려니 하고 생각했습니다. 무겁고 철학적인 영화를 만드는 사람일 거라고요. 독일 영화나 프랑스 영화처럼 어둡고 느릿느릿한 그런 스타일을 예상하고 있었습니다. 근데 막상 틀어보니까 전혀 달랐습니다.
색깔부터 달랐습니다. 화면이 빨갛고 노랗고 초록색이고. 스페인 특유의 강렬한 원색들이 화면 가득 터져 나왔습니다. 처음엔 좀 어지러울 정도였어요. 내용도 제가 예상했던 것과는 거리가 멀었습니다. 가족 이야기인데 보통 가족이 아니고, 사랑 이야기인데 보통 사랑이 아니고. 제 기억이 맞다면 처음 본 작품에서 등장인물 관계를 파악하는 데만 한 30분은 걸린 것 같습니다.
그래도 계속 봤습니다. 왜냐면 뭔가 끌렸거든요. 설명하기 힘든데, 화면에서 에너지가 나왔습니다. 살아있는 느낌? 직장 다닐 때 지루한 보고서만 읽다가 오랜만에 소설책 펼친 느낌이랄까요. 그래서 한 편 보고, 또 한 편 보고, 그렇게 몇 달 사이에 꽤 여러 편을 봤습니다.
💡 미리 알았더라면 좋았을 것들
첫째, 알모도바르는 ‘여성의 감독’이라는 걸 기억하면 좋습니다
남자 감독인데 여성 캐릭터들이 압도적으로 강합니다. 주인공은 거의 대부분 여성이고, 그 여성들이 아주 입체적으로 그려집니다. 단순히 예쁜 역할이나 보조 역할이 아닙니다. 상처 입고, 버텨내고, 때로는 무너지고, 그럼에도 살아가는 그런 여성들입니다. 저는 30년 직장생활 하면서 여성 동료들이 회사에서 얼마나 이중의 무게를 지고 다니는지 봐왔는데, 알모도바르 영화에서 그 감각을 다시 만나는 느낌이 있었습니다.
둘째, 익숙하지 않은 소재들이 나옵니다. 미리 마음을 열어두세요
성 정체성, 트랜스젠더, 근친, 약물, 성적으로 솔직한 장면들. 이런 것들이 자주 나옵니다. 정확하진 않지만, 알모도바르가 활동을 시작하던 시기가 스페인이 프랑코 독재 이후 갑자기 문화적으로 폭발하던 시기였다고 합니다. 억눌렸던 것들이 터져 나오는 분위기 속에서 그의 영화도 그렇게 태어난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충격을 주려고 넣은 게 아니라, 그게 그 사회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진짜 이야기였던 거죠.
저도 처음에는 좀 당혹스러웠습니다. 솔직히. 근데 계속 보다 보면 그런 소재들이 그냥 이야기의 일부가 됩니다. 판단하려고 보지 않으면 의외로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집니다.
셋째, 유머가 있습니다. 진지한 척하지 않아요
유럽 예술 영화라고 하면 다들 무겁고 심각할 거라고 생각하는데, 알모도바르 영화는 자주 웃깁니다. 코미디는 아닌데, 중간에 피식 웃게 만드는 순간들이 있습니다. 비극적인 상황인데도 유머가 섞여 있어요. 삶이 원래 그렇잖습니까. 슬픈 일도 있고 우스운 일도 있고, 그게 동시에 일어나기도 하고. 그 감각이 영화에도 그대로 있습니다.
👍 좋았던 점들
뭐니 뭐니 해도 가장 좋았던 건 화면이 아름답다는 겁니다. 그냥 틀어만 놔도 눈이 즐거웠습니다. 색감, 구도, 배우들의 표정까지. 회화를 보는 것 같은 느낌이랄까요. 저는 미술 전공도 아니고 그쪽으로 아는 게 없는 사람인데도 그 아름다움이 느껴졌습니다.
그리고 배우들이 정말 좋았습니다. 페넬로페 크루즈는 알모도바르 영화에서 자주 나오는데, 다른 헐리우드 영화에서 보던 것과는 완전히 다른 배우처럼 느껴졌습니다. 감독과 배우 사이에 오랜 신뢰가 쌓이면 이런 연기가 나오는구나 싶었습니다. 30년 직장생활 하면서 느낀 건데, 좋은 팀이 좋은 결과를 만든다는 게 영화에서도 똑같이 보였습니다.
무엇보다 영화를 보고 나서 뭔가 남는 게 있었습니다. 깔끔하게 정리되는 느낌이 아니라, 며칠 동안 머릿속에 어른거리는 그런 영화들이었습니다. 퇴직하고 나서 시간은 많은데 생각할 거리가 없어서 허전했는데, 그 빈자리를 알모도바르 영화가 꽤 잘 채워줬습니다.
😅 솔직히 아쉬웠던 점도 있습니다
이건 정말 솔직하게 말씀드리는 겁니다. 작품마다 완성도 차이가 좀 납니다. 누가 봐도 걸작인 작품이 있는 반면에, 같은 감독 작품 맞나 싶을 정도로 뭔가 산만하게 느껴지는 작품도 있었습니다. 저처럼 아무 정보 없이 무작위로 보다 보면 운이 나쁘면 좀 아리송한 작품을 먼저 만날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스페인어 특유의 빠른 대화 속도 때문에 자막을 따라가기 버거울 때가 있었습니다. 자막이 눈에 들어오기도 전에 다음 장면으로 넘어가는 느낌. 나이가 드니까 이게 더 힘들더라고요. 이건 제 개인적인 문제이기도 한데, 처음 보시는 분들은 이 점 감안하시면 좋겠습니다.
또 하나. 어떤 작품들은 구조가 복잡해서 한 번만 보면 다 파악하기 어렵습니다. 과거와 현재가 섞이고, 이야기 안에 이야기가 또 들어가고. 이게 매력이기도 한데, 처음 보는 분들한테는 입장 장벽이 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 자주 나올 것 같은 질문들
Q. 알모도바르 영화, 어떤 작품부터 보면 좋을까요?
이건 정말 많이 받을 것 같은 질문입니다. 제 경험상 너무 초기 작품부터 시작하는 것보다는 중간 시기 이후 작품부터 시작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감독이 어느 정도 자기 스타일을 확립한 이후 작품들이 처음 보는 사람한테는 진입하기 더 수월했습니다. 물론 이건 제 개인적인 느낌이고, 다른 분들은 또 다를 수 있습니다.
Q. 불편한 장면이 많다는데, 어느 정도인가요?
솔직히 말하면, 불편할 수 있습니다. 성적인 표현이나 사회적으로 민감한 소재들이 직접적으로 나옵니다. 다만 그게 자극을 위한 자극이 아니라 이야기의 일부로 녹아있다는 느낌이 있습니다. 마음을 열고 보면 생각보다 훨씬 잘 받아들여집니다. 저도 처음엔 불편했는데 두 번째 작품부터는 그냥 자연스럽게 봤습니다.
Q. 나이 든 사람이 봐도 괜찮은 영화인가요?
저처럼 오십대 이상이 보기에 어떠냐고 물어보신다면, 오히려 더 잘 맞을 수 있다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인생을 좀 살아본 사람이 더 깊이 이해할 수 있는 영화들입니다. 젊은 시절엔 그냥 지나쳤을 감정들이 나이 들고 나서 보면 가슴에 꽂히는 것들이 있습니다. 알모도바르 영화가 딱 그런 종류입니다.
✍️ 마무리하면서
퇴직하고 처음 1년은 솔직히 좀 허전했습니다. 30년을 뭔가를 위해 달려왔는데 갑자기 멈추니까, 그 빈자리가 생각보다 컸습니다. 근데 알모도바르 영화를 보면서 조금씩 달라졌습니다.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들여다보면서 제 이야기도 다시 보게 됐습니다. 거창한 말이 아니라 진짜 그랬습니다.
영화 한 편이 인생을 바꾸진 않습니다. 근데 좋은 영화는 혼자 조용히 앉아서 생각할 거리를 줍니다. 알모도바르 영화가 저한테는 그런 영화였습니다. 처음엔 낯설고 당혹스럽기도 했지만, 지금은 가장 자주 찾게 되는 감독 중 한 명이 됐습니다.
유럽 영화가 어렵게 느껴지거나, 뭔가 새로운 자극이 필요하다고 느끼는 분들이라면 한번 도전해보시면 좋겠습니다. 처음 한두 편은 좀 낯설어도 그냥 끝까지 보시면 됩니다. 그게 제가 드릴 수 있는 가장 솔직한 조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