잔잔한 로드무비가 왜 중년에게 더 잘 맞는가

로드무비 여행

🚗 로드무비, 퇴직하고 나서야 비로소 보이더라고요

이 글을 쓰게 된 건 솔직히 별거 아닌 계기였습니다. 퇴직하고 나서 한 달쯤 됐을 때, 뭘 해야 할지 몰라서 그냥 거실 소파에 앉아 리모컨을 들었습니다. 채널을 이리저리 돌리다가 어떤 영화 채널에서 중년 남자 둘이 낡은 차를 타고 어디론가 달려가는 장면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그냥 틀어놓고 멍하게 봤습니다. 근데 어느 순간 눈물이 났습니다. 왜 우는지도 몰랐습니다.

그때 본 영화가 「네브래스카」였습니다. 제 기억이 맞다면 치매 초기 증세가 있는 아버지와 아들이 함께 차를 타고 먼 길을 달리는 내용이었습니다. 딱히 사건도 없고, 폭발도 없고, 반전도 없었습니다. 그냥 달리고, 대화하고, 침묵하고, 또 달리고. 그게 전부였습니다. 그런데 서른 해 가까이 회사 다니면서 한 번도 안 울던 제가 그 영화 앞에서 두 번이나 멈춰야 했습니다.

그날 이후로 저는 로드무비라는 장르를 조금씩 찾아보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꽤 많이 봤습니다. 오늘은 그 경험을 친구한테 이야기하듯 한번 풀어볼까 합니다.


🎬 막상 여러 편을 보고 나서야 알게 된 것들

처음엔 저도 로드무비가 그냥 “경치 좋은 드라이브 영화” 정도로만 알았습니다. 사실 저도 처음엔 무슨 장르인지도 제대로 몰랐습니다. 액션도 없고, 긴장감도 없으니까 좀 지루하지 않을까 걱정도 했습니다. 근데 막상 몇 편 보고 나니까 완전히 달랐습니다.

로드무비는 목적지보다 그 과정에서 주인공이 어떻게 달라지는가를 보는 영화입니다. 이걸 이해하고 나니까 보는 방식이 달라졌습니다. 회사 다닐 때는 항상 결과만 봤습니다. 이 프로젝트가 성공이냐 실패냐. 이번 분기 실적이 어떠냐. 그런데 로드무비는 그 반대입니다. 결말은 오히려 단순하고, 그 여정 속에서 인물이 뭔가를 잃거나, 얻거나, 그냥 받아들이는 걸 지켜보는 겁니다.

제가 본 영화들 중에서 특히 마음에 남은 것들을 몇 개만 꼽아보면 이렇습니다.

  • 「파리, 텍사스」 — 사막에서 갑자기 나타난 남자가 아들을 찾아가는 이야기입니다. 대사가 많지 않은데 오히려 그게 더 묵직하게 남았습니다.
  • 「인투 더 와일드」 — 젊은 친구 이야기라 처음엔 좀 거리감이 있었습니다. 근데 ‘다 버리고 싶다’는 그 감정만큼은 나이 불문하고 이해가 됐습니다.
  • 「사이드웨이」 — 이건 정말 중년 남자를 위한 영화라고 생각했습니다. 와인 여행인데, 와인 이야기가 아니라 인생 이야기였습니다. 쓸쓸하고, 좀 웃기고, 또 슬펐습니다.
  • 「더 스트레이트 스토리」 — 정확하진 않지만, 노인이 잔디깎이 기계를 타고 수백 킬로를 이동하는 내용으로 기억합니다. 처음엔 황당했는데 다 보고 나서는 한참 멍했습니다.

이 영화들이 공통적으로 가진 게 있습니다. 서두르지 않는다는 겁니다. 장면 하나하나가 천천히 흘러가고, 음악도 요란하지 않고, 카메라도 막 흔들리지 않습니다. 퇴직 전까지는 그런 영화가 지루하게 느껴졌습니다. 근데 이제는 그 느린 템포가 오히려 숨을 고르게 해줍니다.


😌 중년에게 이 장르가 잘 맞는 이유, 제 생각입니다

왜 하필 중년에게 로드무비냐고 물으면, 저는 이렇게 대답할 것 같습니다. 우리는 이미 많이 달려왔으니까, 달리는 사람의 내면을 볼 여유가 생겼다고요.

30년 직장 생활을 하면서 저는 거의 매일 어딘가로 향하고 있었습니다. 출근길, 회의실, 거래처, 또 퇴근길. 근데 그 이동들이 전부 목적지 중심이었습니다. 과정을 음미할 시간이 없었습니다. 로드무비는 그걸 거꾸로 보여줍니다. 목적지가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는 걸, 가는 길에서 이미 뭔가가 완성된다는 걸 보여줍니다.

그게 중년의 감각과 맞닿아 있다고 느꼈습니다. 이십대 때 이 영화들을 봤다면 아마 답답하다고 채널을 돌렸을 겁니다. 빨리 결말이 보고 싶으니까요. 근데 지금은 다릅니다. 저도 살아온 길이 생겼으니까, 화면 속 인물이 창밖을 멍하니 바라보는 그 순간에 같이 멈출 수 있습니다. 그 공감의 무게가 다른 장르와 다릅니다.

또 하나는, 이 영화들이 대체로 용기 있는 포기를 다룬다는 점입니다. 주인공들은 대부분 뭔가를 놓아버리기 위해 길을 떠납니다. 관계든, 과거든, 자아든. 저도 퇴직이라는 게 따지고 보면 그런 거였습니다. 회사라는 정체성을 내려놓는 여정. 그 감각이 화면과 겹쳐지면서 이상하게 위로가 됐습니다.


😅 솔직히 아쉬웠던 점도 있었습니다

좋은 말만 하면 거짓말이니까 솔직하게 얘기하겠습니다.

로드무비, 다 좋은데 너무 느린 작품들은 저도 중간에 졸았습니다. 특히 유럽 쪽 작품들 중에는 침묵이 10분 넘게 이어지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예술적 의도는 알겠는데, 식후에 소파에서 보다 보면 눈이 먼저 감깁니다. 이건 제 집중력 문제일 수도 있는데, 그래도 솔직히 말씀드리는 겁니다.

그리고 결말이 열려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로드무비 특성상 “그래서 어떻게 됐어?”라는 질문에 명확한 답을 안 주는 영화들이 꽤 있습니다. 처음 몇 편은 그게 좀 허망했습니다. 두 시간을 봤는데 결론이 없으니까요. 근데 이건 익숙해지면 오히려 여운으로 받아들이게 됩니다. 처음 도전하시는 분들은 그 부분에서 당황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또 한 가지. 혼자 보기엔 좋은데, 가족이랑 같이 보려고 틀었다가 몇 번 낭패를 봤습니다. 아내가 “이게 무슨 영화야, 아무것도 안 일어나잖아”라고 했는데, 딱히 반론을 펴기가 어려웠습니다. 스펙터클이 없는 영화를 모든 사람이 좋아하진 않는다는 걸 새삼 알게 됐습니다.


❓ 자주 받는 질문들, 제 경험으로 답해봅니다

Q. 로드무비 처음 보는데, 어떤 작품부터 시작하면 좋을까요?

저는 개인적으로 「사이드웨이」를 먼저 권하고 싶습니다. 너무 느리지도 않고, 유머도 있고, 중년 남자의 감정이 정말 잘 담겨 있습니다. 예술영화 특유의 난해함 없이도 로드무비의 맛을 느낄 수 있는 작품입니다. 그다음에 「네브래스카」로 넘어가시면 자연스럽게 이 장르에 빠져들 수 있을 것 같습니다.

Q. 잔잔한 영화가 우울한 기분을 더 심하게 만들지 않나요?

저도 처음엔 그게 걱정됐습니다. 퇴직 직후에 심적으로 좀 허한 상태였으니까요. 근데 막상 보고 나면 오히려 반대였습니다. 자극이 많은 영화보다 훨씬 마음이 차분해졌습니다. 물론 슬픈 감정이 올라오는 건 맞습니다. 근데 그 슬픔이 나쁜 슬픔이 아닌 경우가 많았습니다. 뭔가를 정리하고 내려놓게 해주는, 그런 감정이었습니다. 우울한 분보다는 지쳐 있는 분에게 특히 잘 맞는다고 생각합니다.

Q. 집에서 혼자 봐도 충분한가요, 극장에서 봐야 더 좋은가요?

로드무비는 사실 큰 화면보다 조용한 환경이 더 중요합니다. 저는 주로 오전에 혼자 거실에서 봅니다. 커피 한 잔 내려서 조명 약간 어둡게 하고요. 그 상태에서 보는 게 극장보다 더 몰입이 잘 되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이 장르는 사운드나 스펙터클보다 인물의 표정과 침묵에서 감동이 오기 때문에, 오히려 작은 화면에서 집중해서 보는 것도 충분합니다.


🌅 마무리하며, 이 영화들이 어울리는 사람

긴 이야기를 했는데, 결국 이렇게 정리하고 싶습니다.

로드무비는 빠르게 사는 사람보다 잠깐 멈추고 싶은 사람에게 잘 맞는 장르입니다. 특히 오랫동안 어딘가를 향해 달려왔는데, 이제 그 방향이 흐릿해진 분들. 퇴직이든, 이직이든, 아이가 다 자란 이후든, 뭔가 큰 챕터가 끝나고 다음이 아직 안 보이는 분들에게 권하고 싶습니다.

이 영화들은 답을 주지 않습니다. 대신 같이 달려줍니다. 그게 묘하게 위로가 됩니다. 저처럼 서른 해를 달리고 나서 뭘 해야 할지 몰라 소파에 앉아 있는 분이라면, 한번 시도해보셔도 좋을 것 같습니다.

완벽한 장르는 아닙니다. 졸릴 수도 있고, 허망할 수도 있고, 옆에서 가족이 “이게 뭐야” 할 수도 있습니다. 근데 딱 한 편이 마음에 맞으면, 그다음부터는 찾아보게 됩니다. 저처럼요.

오늘도 커피 내리고 조용히 한 편 보려고 합니다. 읽어주셔서 고맙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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