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찬욱 감독 영화에서 색채가 이야기를 대신할 때

🎬 박찬욱 감독 영화에서 색채가 이야기를 대신할 때

퇴직하고 나서 처음 몇 달은 뭘 해야 할지 몰라서 그냥 텔레비전 앞에 앉아 있는 날이 많았습니다. 30년 동안 아침마다 넥타이 매고 나갔던 사람이 갑자기 아무 일도 없어지니까, 솔직히 좀 막막했습니다. 그러다 집 근처 작은 영화관에서 박찬욱 감독 특별전을 한다는 포스터를 보게 됐습니다. 젊었을 때 극장에서 봤던 기억이 어렴풋이 있었는데, 다시 보면 어떨까 싶어서 들어갔습니다. 근데 막상 앉아서 스크린을 보는데, 예전엔 그냥 “와 잔인하다”, “와 반전이다” 하고 지나쳤던 것들이 그날은 다르게 눈에 들어오더군요. 색깔이었습니다. 화면 가득 흐르는 색깔들이, 뭔가 말을 하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그게 이 글을 쓰게 된 계기입니다.

그날 이후로 저는 박찬욱 감독 영화를 다시 처음부터 찬찬히 보기 시작했습니다. 이번엔 이야기만 따라가는 게 아니라, 화면의 색을 따라가면서 봤습니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비교가 됐습니다. 복수 3부작이라고 불리는 작품들과, 그 이후 나온 작품들, 특히 헤어질 결심까지 이어지는 흐름이 색채 면에서 꽤 다르다는 걸 느꼈습니다. 오늘은 그 이야기를 해보려고 합니다.

🔴 복수 3부작 — 색이 폭력처럼 쏟아진다

제 기억이 맞다면, 복수 3부작 중에서 가장 먼저 본 건 올드보이였습니다. 처음 봤을 때는 그 충격적인 이야기에 정신이 팔려서 색채 같은 건 신경도 못 썼습니다. 근데 이번에 다시 보니까, 화면이 참 어둡고 탁하더군요. 초록빛이 도는 형광등 아래의 복도, 갈색과 회색이 뒤섞인 좁은 공간들. 밝은 색이 거의 없습니다. 있다고 해도 선혈처럼 튀어나오는 빨간색이 전부입니다.

친절한 금자씨는 좀 달랐습니다. 흰색이 많이 쓰입니다. 근데 이게 참 묘한 흰색입니다. 순수함처럼 보이지만, 보다 보면 그게 오히려 더 불안하게 느껴졌습니다. 흰 옷, 흰 두부, 흰 눈. 박찬욱 감독이 흰색을 쓸 때는 결코 깨끗함을 말하는 게 아니라는 걸, 두 번 세 번 보고 나서야 알게 됐습니다. 사실 저도 처음엔 “왜 이렇게 하얗게 찍었지?” 하는 정도였거든요.

복수는 나의 것은 세 작품 중 가장 차갑습니다. 파란색과 회색이 주를 이룹니다. 인물들 표정도 차갑고, 빛도 차갑고, 공기마저 차갑게 느껴지게 색을 썼더군요. 이 세 작품을 놓고 보면, 색이 이야기의 감정 온도를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대사가 없어도, 화면만 봐도 이 이야기가 얼마나 차갑고 얼마나 격렬한지 느껴집니다. 색이 이야기를 대신하고 있는 겁니다.

🔵 헤어질 결심 — 색이 감정을 감춘다

복수 3부작이 색을 통해 감정을 터트린다면, 헤어질 결심은 색을 통해 감정을 숨깁니다. 이게 제가 이 두 계열 사이에서 느낀 가장 큰 차이점입니다.

헤어질 결심의 색채는 한마디로 안개 같습니다. 흐릿하고 서늘하고 촉촉합니다. 회청색, 회녹색, 회보라색. 색이 있는데 선명하지가 않습니다. 바다 장면도, 산 장면도, 심지어 실내 장면도 전부 살짝 뭉개진 것처럼 보입니다. 정확하진 않지만, 이게 아마도 안개 낀 해안가의 공기를 표현한 것 같기도 하고, 동시에 두 주인공이 서로에게 품고 있는 감정의 불분명함을 표현한 것 같기도 합니다.

복수 3부작에서 빨간색은 명확하게 피를 뜻하고, 흰색은 명확하게 어긋난 순수를 뜻했습니다. 근데 헤어질 결심에서 파란색은, 뭘 뜻하는지 딱 잘라 말하기가 어렵습니다. 차가움인지, 그리움인지, 아니면 그냥 그 감정이 무엇인지 본인도 모르는 상태인지. 색이 의미를 가리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그리고 그게 이 영화의 핵심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직장 다닐 때 저한테 늘 답을 요구했던 상황들이 많았습니다. 이게 좋냐 나쁘냐, 이게 맞냐 틀리냐. 근데 헤어질 결심을 보면서, 아 색이 이렇게 모호할 수도 있구나, 그리고 그 모호함이 오히려 더 진실에 가까울 수 있구나,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58살 먹어서 영화 색깔 보고 그런 생각을 하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 두 계열을 직접 비교하며 느낀 것들

여러 번 비교해서 보다 보니까, 차이점이 좀 더 구체적으로 잡히기 시작했습니다.

  • 색의 선명도: 복수 3부작은 색이 강하고 선명합니다. 헤어질 결심은 색이 있지만 흐립니다.
  • 색의 쓰임새: 복수 3부작에서 색은 상징을 직접 전달합니다. 헤어질 결심에서 색은 감정의 여백을 만들어 냅니다.
  • 색과 대사의 관계: 복수 3부작에서 색은 대사보다 앞서 나옵니다. 헤어질 결심에서 색은 대사조차 못 다 담은 감정을 끌어안습니다.

아쉬웠던 점도 솔직히 말씀드려야겠습니다. 복수 3부작을 다시 볼 때, 특히 밤 장면이나 실내 장면은 화면이 워낙 어둡고 탁해서 색채 분석을 하려고 해도 눈이 쉽게 피로해졌습니다. 나이가 들면서 시력이 좀 떨어진 탓도 있겠지만, 객관적으로도 어두운 화면은 집에서 작은 화면으로 보기엔 한계가 있었습니다. 극장에서 큰 화면으로 봐야 감독이 의도한 색이 제대로 보인다는 걸 나중에 깨달았습니다. 처음부터 극장을 고집했으면 더 좋았을 텐데, 그건 좀 아쉬웠습니다.

헤어질 결심도 마찬가지입니다. 흐릿한 색채가 의도적이라는 걸 알고 나면 감탄스럽지만, 모르고 보면 그냥 화질이 별로라고 느낄 수도 있습니다. 영상미를 즐기려면 어느 정도 배경지식이나 집중력이 필요하다는 게 솔직한 얘기입니다.

🧑‍🤝‍🧑 어떤 분께 어떤 계열이 맞을까

복수 3부작은, 영화를 볼 때 “내가 지금 뭔가 강렬한 걸 보고 있다”는 느낌을 원하는 분께 맞습니다. 감정이 직접적으로 전달되고, 색과 이야기가 함께 폭발하듯 움직이기 때문에, 영화를 보고 난 뒤에 한동안 멍하게 앉아 있게 됩니다. 무언가 얻어맞은 것 같은 느낌을 원한다면 이쪽입니다.

헤어질 결심은, 영화를 보고 나서 며칠이 지나도 자꾸 생각이 나는 종류의 경험을 원하는 분께 맞습니다. 색이 감정을 담아두고 있다가 나중에 천천히 흘러나오는 느낌이랄까요. 이 영화는 다 보고 나서 바로 이해되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오히려 그게 정상입니다. 어느 날 출근하다가, 아니면 퇴직한 저처럼 산책하다가, 문득 그 파란 화면이 떠오르는 경험을 하게 될 겁니다.

제 경험으로는, 은퇴 후 좀 긴 시간을 혼자 보내는 분들, 또는 뭔가 말로 표현 못 하는 감정이 마음속에 오래 쌓여 있는 분들이라면 헤어질 결심의 색채가 굉장히 다르게 다가올 것 같습니다.

✍️ 마무리하며

박찬욱 감독 영화를 다시 보기 시작하면서, 저는 처음에 이야기를 따라가려고 했습니다. 근데 결국 색을 따라가게 됐습니다. 그 색들이 이야기보다 더 많은 걸 말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복수 3부작의 터질 듯한 색채와, 헤어질 결심의 안개 같은 색채는, 같은 감독의 작품이면서도 전혀 다른 방식으로 관객의 감정을 건드립니다. 어느 쪽이 더 낫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다만 어떤 날의 내가 어느 색이 필요한지는 다를 수 있다는 생각은 했습니다.

30년 동안 숫자와 보고서 속에서 살다가, 이제야 색깔에 대해 이야기하게 됐습니다. 늦었지만, 이런 걸 느끼는 시간이 생긴 것 자체가 저한테는 나쁘지 않은 일입니다. 오늘도 근처 극장 시간표를 확인해 볼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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