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창동 감독 영화에 자주 등장하는 침묵의 연출 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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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창동 감독 영화에 자주 등장하는 침묵의 연출 의도

퇴직하고 나서 뭘 해야 할지 처음엔 막막했습니다. 삼십 년 넘게 아침마다 출근하던 사람이 갑자기 하루 종일 집에 있으니까요. 그러다 자연스럽게 영화관 문턱을 자주 넘게 됐습니다. 처음엔 그냥 시간 때우는 용도였는데, 이상하게도 이창동 감독 영화 앞에선 그게 안 됐습니다. 시간이 때워지는 게 아니라 오히려 뭔가 들러붙는 느낌이랄까요. 특히 영화 속 침묵이 마음을 건드리더군요.

그래서 이 글을 쓰게 된 건데요, 사실 처음엔 저도 이창동 영화가 좋다고 말하기 좀 쑥스러웠습니다. “예술 영화 좋아한다”고 하면 괜히 있어 보이려는 사람처럼 보일까봐요. 근데 막상 여러 편을 연달아 보다보니, 이 양반 영화에서 침묵이 얼마나 다르게 쓰이는지 비교하게 됐습니다. 오늘은 그 이야기를 좀 해보려고 합니다.

🔇 이창동 영화 속 침묵, 두 가지 방식

제 기억이 맞다면, 이창동 감독 영화에서 침묵은 크게 두 가지 방식으로 나뉘는 것 같습니다. 하나는 ‘인물이 말을 잃어버린 침묵’이고, 다른 하나는 ‘인물이 말을 거부하는 침묵’입니다. 언뜻 같아 보이지만, 실제로 화면을 보고 있으면 느낌이 완전히 다릅니다. 저처럼 직장 생활만 30년 한 사람도 그 차이가 느껴질 정도니까요.

😶 말을 잃어버린 침묵 — 슬픔이 말을 앞지를 때

이 유형은 주로 상실 장면에서 나옵니다. 인물이 충격을 받거나, 너무 크게 슬퍼서 말이 나오질 않는 경우입니다. 밀양에서 이정의 얼굴이 떠오릅니다. 아들을 잃은 뒤에 그 여자가 보여주는 침묵은 단순히 대사가 없는 장면이 아니었습니다. 카메라가 얼굴을 오래 붙들고 있는데, 그 안에 뭔가 무너지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습니다. 이상하게 표현하는 것 같아도 사실 그게 맞습니다.

회사에서 오래 일하다 보면 별일을 다 겪습니다. 같이 일하던 동료가 갑자기 세상을 떠나기도 하고, 윗사람한테 부당한 일을 당해도 아무 말 못 하는 순간도 있었고요. 그 순간들을 되돌아보면, 말이 안 나오는 게 나약한 게 아니라는 걸 압니다. 감당이 안 되니까 말이 사라지는 겁니다. 이창동 감독은 그걸 화면에 그대로 담아냅니다. 인물이 더듬거리거나 허공을 바라보게 놔두고, 카메라는 물러서지 않습니다. 관객은 그 불편함을 같이 견뎌야 합니다.

오아시스에서도 비슷한 장면들이 있었습니다. 공주가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하면서도 뭔가를 전달하려는 장면들, 말보다 눈빛이 앞서는 그 순간들이요. 정확하진 않지만, 그 침묵들이 결국 인물이 세상에서 얼마나 고립돼 있는지를 설명하는 방식이었던 것 같습니다. 대사로 설명하면 오히려 덜 전달됐을 겁니다.

🤐 말을 거부하는 침묵 — 저항이자 선택

두 번째 유형은 좀 다릅니다. 인물이 말할 수 있는데도 하지 않는 경우입니다. 이건 훨씬 능동적인 침묵입니다. 버닝에서 주인공 종수가 해수를 만나고, 또 벤이라는 인물을 만나면서 보여주는 침묵이 여기에 가깝습니다. 종수는 할 말이 없는 게 아닙니다. 오히려 너무 많은데 입이 안 열립니다. 계층의 차이, 말해봤자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는다는 체념 같은 것들이 그 침묵 안에 쌓여 있는 느낌이었습니다.

저도 직장 생활 하면서 그런 침묵을 꽤 많이 써봤습니다. 회의 자리에서 말도 안 되는 지시를 받아도 아무 말도 안 했던 순간들이 있었습니다. 반박해봤자 달라지는 게 없다는 걸 알았으니까요. 그게 비겁함인지, 생존 방식인지 아직도 잘 모르겠습니다. 버닝의 침묵을 보면서 그런 기억들이 불쑥 올라와서 혼자 민망했던 적이 있습니다.

시에서 미자 할머니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할머니는 진실을 알아가면서도 끝까지 어떤 말들을 하지 않습니다. 해야 할 말이 있는데, 입 밖으로 내놓는 순간 세상이 달라질까봐 붙잡아두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침묵이 저항인 동시에 두려움인 경우입니다. 이 두 감정이 동시에 존재할 수 있다는 걸 그 영화에서 처음 실감했습니다.

🧐 직접 여러 편 보고 나서 느낀 차이

솔직히 처음에 이창동 영화를 볼 때는 침묵 장면이 길면 지루하다고 느꼈습니다. 이게 다 무슨 의미냐, 그냥 대사로 해주면 안 되나 싶었습니다. 제 나이 또래 사람들이 많이 그럴 겁니다. 뭔가 속 시원하게 설명해주는 걸 좋아하는 세대니까요. 근데 세 편, 네 편을 이어서 보다보니 달라졌습니다.

말을 잃은 침묵과 말을 거부하는 침묵은 화면에서 확실히 다르게 보입니다. 전자는 카메라가 인물의 얼굴을 가깝게 잡고 오래 머뭅니다. 인물은 어딘가 초점 없는 눈으로 있거나, 뭔가를 억누르는 표정입니다. 후자는 상대방 얼굴이 함께 잡히거나, 인물이 의도적으로 시선을 피하거나 몸을 돌립니다. 공간을 이용하는 방식 자체가 다릅니다.

이창동 감독이 인터뷰에서 말한 것 중에 제가 기억하는 게 있습니다. 정확하진 않지만, “영화에서 말해지지 않는 것들이 더 진실에 가깝다”는 취지의 이야기였던 것 같습니다. 처음엔 무슨 말인지 몰랐는데, 여러 편 보고 나니 그게 뭔지 조금 알 것 같습니다. 직장 생활 삼십 년 동안 회의록에 안 적힌 말들, 보고서에 없던 진짜 이야기들이 항상 더 중요했으니까요.

💡 어떤 분께 어떤 침묵이 더 맞을지

말을 잃어버린 침묵, 그러니까 밀양이나 오아시스 계열이 더 잘 맞는 분이 있습니다. 개인적인 상실을 겪은 분, 또는 지금 무언가를 잃어가는 과정에 있는 분들입니다. 슬픔을 언어로 정리하려고 할 때 오히려 말이 방해가 된다고 느끼는 분들이라면 그 침묵 안에서 오히려 위로를 받을 수 있습니다. 제 친구 중에 부모님 돌아가신 후에 밀양을 보고 혼자 한참 울었다고 했는데, 그게 이상한 반응이 아닌 겁니다.

반대로 말을 거부하는 침묵, 버닝이나 시 계열이 맞는 분도 따로 있습니다. 사회적 불합리함 앞에서 분노는 있는데 표현하지 못한 경험이 많은 분들입니다. 나이 불문하고, 특히 사회생활을 오래 한 분들이라면 종수의 침묵이 남 일 같지 않게 느껴질 겁니다. 저는 확실히 이쪽에서 더 많이 건드렸습니다.

다만 한 가지 아쉬운 점도 있습니다. 이창동 감독 영화의 침묵이 강력한 연출 도구인 건 맞는데, 가끔은 그게 관객에게 너무 많은 걸 요구하는 것 같기도 합니다. 영화를 보는 내내 긴장을 놓지 못하고, 침묵의 의미를 계속 해석하려다 보면 피로감이 생기기도 합니다. 이건 단점이 아닐 수도 있지만, 가볍게 영화를 즐기고 싶은 날에는 확실히 맞지 않습니다. 그런 날엔 솔직히 이창동 영화 말고 다른 걸 보는 게 낫습니다.

✍️ 마무리하며

퇴직하고 나서 생긴 가장 큰 변화가 뭔지 아십니까. 더 이상 참을 이유가 없어졌다는 겁니다. 말하고 싶을 때 말하고, 침묵하고 싶을 때 침묵해도 됩니다. 삼십 년 동안 그게 안 됐었는데요. 그래서인지 이창동 감독 영화의 침묵들이 요즘 더 다르게 느껴집니다. 예전엔 그냥 지루한 장면이었던 게, 지금은 누군가의 오래된 무게처럼 읽힙니다.

이창동 감독이 침묵을 연출에 쓰는 건, 제 생각엔 말이 항상 진실을 전달하지 않는다는 걸 알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아주 솔직한 연출 방식입니다. 그게 때로 불편하고, 때로 너무 무겁게 느껴지기도 하지만요. 오늘 이 이야기를 오랜 친구한테 털어놓듯 쓰고 나니 조금 개운합니다. 혹시 이창동 영화를 아직 안 보셨다면, 조용한 날 저녁에 한 편만 먼저 보시길 권해드립니다. 어떤 침묵이 더 마음에 남는지는, 결국 본인이 살아온 이야기와 닿아 있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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