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토퍼 놀란 영화에서 반복되는 시간 구조 정리

놀란시간구조

🎬 퇴직하고 나서야 제대로 본 놀란 영화들

솔직히 말하면, 직장 다닐 때는 영화를 그냥 “봤습니다”. 보기는 봤는데 머릿속에 남는 게 없었습니다. 퇴근하고 지쳐서 소파에 누워 틀어놓다가 절반쯤에 잠들기 일쑤였고, 주말에는 가족들 맞춰주느라 제가 보고 싶은 걸 고를 여유도 없었습니다. 그러다 작년 초에 퇴직을 했습니다. 30년이 넘는 직장생활이 끝나고 갑자기 시간이 생기니까, 처음엔 뭘 해야 할지 몰라서 하루 종일 멍하니 있었던 날도 꽤 많았습니다.

그 무렵에 막내가 추천해준 게 크리스토퍼 놀란 영화였습니다. “아빠 머리 좋은 영화 좋아하잖아”라고 했는데, 사실 저는 그냥 밥 먹으면서 볼 수 있는 가벼운 거 원했거든요. 근데 막상 틀어놓으니까 밥을 먹다 숟가락을 내려놓게 되더라고요. 이 글을 쓰게 된 건 그 이후로 놀란 영화를 거의 다 찾아보고 나서, “아 이 감독은 진짜 시간을 갖고 노는구나”라는 생각이 자꾸 머릿속에 맴돌았기 때문입니다. 누군가한테 털어놓고 싶어서 씁니다.

🕰️ 처음엔 그냥 복잡한 영화인 줄만 알았습니다

처음 본 게 인터스텔라였습니다. 정확하진 않지만, 두 번은 봤을 겁니다. 한 번 보고 나서 이해가 안 됐거든요. 주인공이 딸한테 메시지를 보내는 장면, 블랙홀 안에서 과거 시간대를 손가락으로 건드리는 장면. 처음엔 그냥 “SF 영화에서 있을 법한 설정”이라고 넘겼습니다. 그런데 두 번째 볼 때는 달랐습니다. 아, 이 영화에서 시간은 공간처럼 펼쳐져 있는 거구나. 선형으로 흐르는 게 아니라 입체로 쌓여 있는 거구나. 그걸 깨닫고 나니까 소름이 돋았습니다.

그러고 나서 메멘토를 봤습니다. 이건 뭐… 처음엔 그냥 황당했습니다. 이야기가 거꾸로 가니까 저 같은 사람은 따라가기가 벅찼습니다. 제 기억이 맞다면, 흑백 장면은 시간순으로 가고 컬러 장면은 역순으로 가는 구조였던 것 같습니다. 처음엔 왜 이렇게 만들었나 싶었는데, 나중에 보니까 그게 주인공의 기억 장애와 완벽하게 연결된 거였습니다. 감독이 형식으로 내용을 설명하고 있었던 겁니다. 그때부터 놀란 영화가 다르게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인셉션도 봤고, 테넷도 봤습니다. 테넷은… 솔직히 세 번 봤는데도 완전히 이해했다고 말하긴 어렵습니다. 그냥 느낌으로 받아들인 부분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 안에서 반복되는 무언가가 있다는 건 분명히 느꼈습니다. 시간. 계속 시간 이야기를 하고 있었습니다.

📐 놀란이 시간을 다루는 방식, 이런 패턴이 보였습니다

여러 편을 보고 나서 제 나름대로 정리해봤습니다. 영화 전공자도 아니고 그냥 퇴직한 아저씨의 시각이니까, 틀린 부분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첫 번째 패턴: 시간의 방향을 뒤집거나 쪼갭니다

메멘토는 역순 구조입니다. 결말을 먼저 보여주고 원인을 나중에 알게 됩니다. 테넷은 아예 시간이 역행하는 물질과 순행하는 물질이 공존합니다. 근데 재미있는 건, 이게 단순히 “신기한 구조”가 아니라는 겁니다. 메멘토에서는 관객이 주인공과 똑같은 상태에 놓이게 됩니다. 뭘 믿어야 할지 모르는 상태요. 구조 자체가 감정이 되는 겁니다. 이 부분이 저한테는 꽤 강렬하게 남았습니다.

두 번째 패턴: 시간의 속도가 다른 공간을 만듭니다

인터스텔라에서 제일 마음이 무너지는 장면이 뭔지 아십니까. 주인공이 행성 하나를 다녀왔는데 지구에서는 수십 년이 흘러버린 장면입니다. 딸의 영상 메시지가 쌓여있는 걸 보는 장면. 저는 거기서 진짜로 눈물이 났습니다. 딸이 어른이 돼서 “아빠 이제 그만 와도 돼”라고 말하는 장면. 30년 직장생활 하면서 애들 곁에 많이 못 있어줬던 게 생각나서 그랬던 것 같습니다. 놀란은 시간의 속도 차이로 이별과 그리움을 설명합니다. 말로 하지 않고요.

세 번째 패턴: 시작과 끝이 연결됩니다

테넷에서 주인공이 작전 초반에 누군가에게 구출되는 장면이 있습니다. 영화 끝 무렵에 그 구출하는 쪽이 사실 자기 자신이었다는 게 밝혀집니다. 인셉션도 마찬가지입니다. 맨 처음 장면과 맨 마지막 장면이 연결됩니다. 놀란은 영화를 선형으로 쌓지 않고, 원형으로 묶는 경향이 있는 것 같습니다. 끝에서 다시 처음을 보면 의미가 달라지는 구조요. 이게 한 번 보고 끝내기 아까운 이유이기도 합니다.

👍 좋았던 점, 진심으로

퇴직하고 나서 제일 힘든 게 뭔지 아십니까. 머리 쓸 일이 없어진다는 겁니다. 회사 다닐 땐 싫어도 매일 뭔가를 생각하고 결정하고 판단했는데, 그게 없어지니까 오히려 멍청해지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놀란 영화는 그 부분을 채워줬습니다. 멍하니 보는 게 아니라 적극적으로 따라가야 하고, 보고 나서 혼자 정리도 해보게 됩니다. 메모도 해봤습니다. 오랜만에 종이에 뭔가를 적어봤는데 그것도 나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감정적인 측면에서도 좋았습니다. 이 나이에 SF 영화에서 눈물 흘릴 줄은 몰랐는데, 인터스텔라는 제 이야기처럼 느껴졌습니다. 시간이 지나면 돌이킬 수 없다는 것, 그런데 그 안에서도 사랑은 어떻게든 전달된다는 것. 그게 과학 설정으로 포장돼 있어서 오히려 더 울컥했던 것 같습니다.

😅 아쉬웠던 점도 솔직하게 말씀드립니다

근데 이게 마냥 좋기만 한 건 아닙니다. 테넷은 정말 두 손 두 발 다 들었습니다. 시간 역행 개념이 머릿속에서 충돌하면서, 어느 순간부터 감정이 끊기더라고요. 뭔 일이 일어나는지 파악하려고 머리를 쓰다 보니 인물한테 감정이입이 안 됐습니다. 놀란이 구조에 너무 공을 들인 나머지, 사람을 잊어버린 게 아닌가 싶었습니다. 주인공 이름도 없고, 그 사람이 뭘 느끼는지도 잘 모르겠고. 저는 결국 세 번을 봐도 마음이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머리는 움직였지만요.

또 한 가지는, 이 영화들이 혼자 보기엔 좋은데 같이 보기가 참 어렵다는 겁니다. 와이프한테 인터스텔라 보자고 했다가 “뭔 소리야 이게”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설명해주려고 했더니 “보면서 설명하지 말라”고 하고, 설명 안 하면 모르겠다고 하고. 결국 와이프는 중간에 일어났습니다. 같이 볼 수 있는 영화는 아닌 것 같습니다. 적어도 우리 부부한테는요.

❓ 자주 받는 질문들, 제가 아는 선에서 답해봅니다

Q. 놀란 영화, 어떤 순서로 보는 게 좋을까요?

제 기준으로는 메멘토 → 인셉션 → 인터스텔라 → 테넷 순서를 권합니다. 메멘토가 비교적 구조가 단순하고, 인셉션이 그 다음 단계, 인터스텔라는 감정적으로 제일 접근하기 쉽고, 테넷은 마지막에 봐야 그나마 준비가 된 상태에서 볼 수 있습니다. 처음부터 테넷 보면 놀란 영화 자체가 싫어질 수 있습니다.

Q. 인터스텔라 결말이 무슨 뜻인가요?

정확하진 않지만, 제가 이해한 건 이렇습니다. 블랙홀 안의 5차원 공간에서 주인공은 시간을 하나의 공간 축으로 이동할 수 있게 됩니다. 그래서 딸의 과거 방에 접근해서 신호를 보낼 수 있었던 거고, 딸은 그걸 받아서 인류를 구하는 데이터를 얻습니다. 결국 미래의 인류가 그 공간을 만들어놨고, 주인공이 그걸 통해 딸과 연결됩니다. 사랑이 시간을 초월한다는 메시지인데, 과학으로 포장해놨습니다.

Q. 놀란 영화, 머리 나쁜 사람은 못 즐기나요?

저도 처음엔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근데 아닙니다. 완전히 이해 못 해도 느낄 수 있습니다. 인터스텔라는 구조를 다 몰라도 아버지와 딸 이야기로만 봐도 충분히 감동적입니다. 다 알려고 하면 오히려 힘들어집니다. 한 번은 그냥 느끼고, 두 번째는 생각하면서 보는 게 제 방식입니다.

✍️ 마무리하면서

퇴직하고 나서 시간이 많아졌는데, 그 시간을 어떻게 쓸지 한동안 몰랐습니다. 놀란 영화를 보면서 한 가지 생각이 들었습니다. 시간은 그냥 흐르는 게 아니라,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달라진다는 것. 영화 안에서의 이야기인데, 제 현실하고도 연결되는 느낌이 있었습니다.

이 글이 누군가한테 도움이 됐으면 합니다. 특히 저처럼 퇴직 후에 뭔가 머리를 쓰고 싶은 분, 감동도 받고 싶은데 멜로는 좀 부끄러운 분, 그리고 오랫동안 영화를 그냥 흘려보내왔던 분들한테 놀란 영화는 꽤 좋은 선택이 될 것입니다. 단, 테넷은 각오하고 보시기 바랍니다. 저는 세 번 봤는데도 아직 다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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