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퇴직하고 나서야 제대로 보게 된 구로사와 아키라
솔직히 말하면, 퇴직 전까지 구로사와 아키라라는 이름은 그냥 “유명한 일본 감독” 정도로만 알고 있었습니다. 직장 다닐 때 어떤 후배가 칠판에 영화 추천 목록을 써놓은 걸 본 적이 있었는데, 거기에 라쇼몬이 적혀 있었고 “아, 그 흑백 영화?” 하고 넘겼던 기억이 납니다. 그게 제 구로사와 아키라와의 첫 인연이었습니다. 별 감흥 없이 스쳐 지나간 이름 하나.
그런데 퇴직하고 집에 있는 시간이 늘면서 예전엔 그냥 지나쳤던 것들을 다시 보게 되더군요. OTT 서비스를 하나 구독해서 이것저것 뒤적이다가, 어쩌다 7인의 사무라이를 틀게 됐습니다. 처음엔 그냥 “심심하니까 고전 하나 볼까” 하는 마음이었습니다. 근데 막상 보기 시작하니까, 이게 멈춰지지가 않는 겁니다. 세 시간이 넘는 영화인데도 중간에 일어날 생각을 못 했습니다. 그날 이후로 저는 완전히 구로사와에 빠져버렸습니다.
이 글을 쓰게 된 건, 제 또래 친구들이랑 이야기하다 보면 구로사와를 “어렵고 지루한 옛날 영화 감독”으로만 아는 경우가 너무 많아서입니다. 그게 좀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사실 저도 처음엔 그런 편견이 있었으니까요. 그래서 오늘은 제가 직접 구로사와 영화들을 몇 달에 걸쳐 보면서 느낀 것들, 그리고 이 양반이 헐리우드를 어떻게 뒤흔들었는지 제 방식으로 한번 풀어보려 합니다.
🎥 직접 다 봐보니까 — 구로사와 영화와의 본격적인 만남
7인의 사무라이를 본 다음 날, 저는 구로사와 작품을 체계적으로 보겠다고 마음먹었습니다. 아내한테는 “취미 생긴 거 좋은 거 아니냐”고 했고, 아내는 “TV 앞에 더 오래 앉아 있겠다는 거잖아요”라고 했습니다. 뭐, 틀린 말은 아닙니다.
처음엔 순서가 뭔지도 몰랐습니다. 제 기억이 맞다면 라쇼몬, 이키루, 7인의 사무라이, 요짐보, 란 이 정도가 대표작으로 꼽히더군요. 저는 그냥 흥미가 당기는 것부터 봤습니다. 순서보다는 감이 먼저였습니다.
이키루를 봤을 때는 좀 다른 감정이 올라왔습니다. 30년 넘게 직장 생활을 한 제가, 퇴직 후에 ‘이제 어떻게 살지’를 고민하던 시점에 봤거든요. 영화 속 주인공이 시청 공무원으로 수십 년을 보내다 병을 알고 나서야 비로소 의미 있는 일을 하려는 이야기인데… 중간에 울었습니다. 제가 그 주인공이랑 묘하게 겹쳐 보였거든요. 구로사와가 그냥 액션 사무라이 영화나 찍는 감독이 아니라는 걸 그때 제대로 느꼈습니다.
요짐보는 또 달랐습니다. 이건 완전 통쾌한 장르 영화였습니다. 근데 이게 나중에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황야의 무법자로 리메이크됐다는 걸 알고 나서, 저도 모르게 “아!” 소리가 나왔습니다. 황야의 무법자는 제가 젊을 때부터 좋아하던 영화였거든요. 그 영화의 원형이 구로사와 아키라였다는 게 좀 충격이었습니다. 정확하진 않지만, 심지어 당시 제작사가 저작권 문제로 소송을 했다는 이야기도 어디서 읽은 것 같습니다.
⭐ 좋았던 점 — 헐리우드가 왜 이 양반한테 무릎을 꿇었는지
구로사와 영화를 보면서 제일 먼저 느낀 건, 장면 하나하나가 그냥 설명이 된다는 겁니다. 대사 없이도 카메라 위치 하나, 배우 시선 하나로 상황이 다 읽힙니다. 30년 직장 생활 하면서 회의 자료 만들고 보고서 쓰던 사람으로서 말하자면, 이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압니다. 군더더기 없이 핵심만 전달하는 것. 그게 진짜 실력이거든요.
헐리우드 감독들이 구로사와한테서 가져간 게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제가 공부하듯 이것저것 찾아본 결과를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 조지 루카스는 스타워즈를 구상할 때 구로사와의 숨겨진 요새의 세 악인에서 영향을 받았다고 직접 밝혔습니다. 두 농민 캐릭터가 R2-D2와 C-3PO의 원형이라는 거, 루카스가 인터뷰에서 한 말입니다.
- 스티븐 스필버그는 구로사와를 가리켜 “영화의 셰익스피어”라고 불렀습니다. 이건 그냥 덕담이 아니라, 구로사와 특유의 서사 구조와 인물 묘사 방식이 헐리우드의 블록버스터 문법에 녹아들었다는 뜻입니다.
- 시드니 폴락, 코폴라, 마틴 스콜세지같은 감독들도 공개적으로 구로사와를 언급했습니다. 스콜세지는 아예 구로사와 영화 복원 프로젝트에 직접 나서기도 했다고 들었습니다.
근데 제가 더 흥미롭게 느낀 건, 이게 단순한 영향을 넘어서 헐리우드가 구로사와의 형식 자체를 수입했다는 점입니다. 여러 시점에서 같은 사건을 바라보는 방식, 주인공이 확실한 영웅이 아닌 복잡한 인간으로 그려지는 방식, 군중 속의 개인을 따라가는 카메라 연출. 이런 것들이 지금 헐리우드 영화에서도 그대로 쓰입니다. 우리가 당연하게 보고 있는 영화의 문법 상당 부분이 구로사와한테서 온 겁니다.
특히 란을 봤을 때는 압도당했습니다. 전쟁 장면의 스케일, 색채 사용, 군중 연출. 요즘 CGI 없이 저걸 어떻게 찍었지 싶은 장면들이 연속으로 나옵니다. 저 같은 영화 문외한도 ‘이건 다르다’는 걸 느낄 정도였습니다.
😅 아쉬웠던 점 — 솔직하게 털어놓겠습니다
모든 게 좋았냐고요? 솔직히 그건 아닙니다. 처음 접근할 때 진입 장벽이 꽤 높습니다.
일단 러닝타임이 깁니다. 7인의 사무라이는 세 시간이 넘고, 란도 만만치 않습니다. 저처럼 딱히 일정이 없는 퇴직자야 괜찮지만, 바쁜 분들한테는 부담이 될 수 있습니다. 중간에 잠깐 끊어봤다가 다시 이어보면 흐름이 끊기는 느낌도 있었습니다.
또 하나. 흑백 영화에 대한 심리적 거부감은 저도 처음엔 있었습니다. 라쇼몬을 보기 시작했을 때 솔직히 10분쯤 지나서 ‘이거 좀 지루한데?’ 싶었습니다. 그냥 끄려다가 참고 봤는데 결국 끝까지 봤습니다만, 모든 사람이 그 10분을 버틸 수 있는 건 아니거든요. 이게 구로사와 영화의 잘못이라기보다는, 우리가 워낙 빠른 전개의 영상에 익숙해져 있는 탓이긴 합니다.
그리고 — 이건 좀 개인적인 불만인데 — OTT에서 화질이 들쭉날쭉합니다. 어떤 작품은 복원이 잘 돼서 보기 좋은데, 어떤 건 화면이 너무 거칠어서 집중이 안 될 때가 있었습니다. 구로사와 영화를 제대로 보고 싶다면 좋은 복원판을 찾아서 보는 게 훨씬 낫습니다. 이 부분은 찾아보는 수고가 좀 필요합니다.
❓ 자주 묻는 질문들
Q. 구로사와 영화, 어디서부터 보는 게 좋을까요?
저는 개인적으로 7인의 사무라이를 추천합니다. 흑백 영화이지만, 장르 영화의 형식을 갖추고 있어서 처음 접하는 분들도 어렵지 않게 들어갈 수 있습니다. 거기서 재미를 느끼면 이키루, 요짐보, 란으로 넘어가시면 됩니다. 라쇼몬은 명작이지만, 처음 보는 분께는 진입 장벽이 살짝 있을 수 있습니다.
Q. 구로사와 영화가 정말 요즘 헐리우드에도 영향을 주고 있나요?
네, 지금도 현재진행형입니다. 최근 나온 영화들 중에서도 앙상블 캐릭터 구조(여러 개성 강한 인물들이 한 팀을 이루는 방식)는 7인의 사무라이에서 온 거라는 분석이 많습니다. 어벤져스 같은 영화가 대표적입니다. 제 기억이 맞다면 조스 웨던 감독도 구로사와를 언급한 인터뷰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Q. 영화를 잘 모르는 사람도 재미있게 볼 수 있을까요?
솔직히 말씀드리면, “재미있게”의 기준이 중요합니다. 마블 영화처럼 화려하고 빠른 재미를 기대하시면 초반에 당황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30분만 버티면, 이야기에 빨려 들어가는 그 감각은 어떤 영화 못지않습니다. 저처럼 영화 전공도 아니고 그냥 보는 사람도 충분히 즐길 수 있었습니다.
✍️ 마무리하며 — 구로사와가 제게 남긴 것
몇 달 동안 구로사와 영화를 쭉 보고 나서 드는 생각이 있습니다. 이 양반은 자기 이름이 헐리우드 교과서에 남을 거라는 걸 알고 찍지 않았을 겁니다. 그냥 자기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자기가 가진 방식으로 찍은 거겠지요. 근데 그게 결국 세상의 영화 언어 자체를 바꿔버렸습니다.
저도 30년 직장 생활 하면서 뭔가 남긴 게 있는지 가끔 생각합니다. 구로사와처럼 거창한 유산은 아니더라도, 묵묵히 자기 자리에서 진심으로 임했던 사람의 흔적은 어딘가에 남는다는 걸, 이키루를 보고 나서 새삼 느꼈습니다.
구로사와 아키라. 그냥 “유명한 일본 감독” 이상입니다. 오늘 저녁 시간 여유 있으시면, 한번 틀어보시길 권합니다. 후회는 안 하실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