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퇴직하고 나서야 처음부터 다시 봤습니다
퇴직하고 나서 제일 먼저 한 일이 뭔지 아십니까. 밀린 잠 자기도 아니고, 여행 계획 세우기도 아니었습니다. 그냥 소파에 앉아서 영화를 틀었습니다. 아무 생각 없이. 그게 시작이었습니다.
처음엔 그냥 유명한 것들 위주로 봤습니다. 기생충이야 워낙 유명하니까 다시 봤고, 옥자도 한 번 더 봤습니다. 근데 어느 날 문득 이런 생각이 드는 겁니다. 봉준호 감독, 이 사람 영화를 처음부터 순서대로 다 본 적이 있었나? 솔직히 없었습니다. 직장 다닐 때는 뭐든 중간 중간 끊겨서 봤으니까요. 개봉할 때 바빠서 못 보고 나중에 TV에서 본 것도 있고, 그냥 유명한 장면만 유튜브에서 본 것도 있고. 그런 식이었습니다.
그래서 한번 해봤습니다. 데뷔작부터 순서대로. 한 편 보고, 며칠 두었다가, 또 한 편 보고. 급하게 다 몰아서 보는 게 아니라, 퇴직자의 여유로 천천히. 그렇게 전작을 다 보고 나니까 뭔가가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아, 이 감독이 이렇게 변해왔구나. 그리고 이렇게 변하지 않은 것도 있구나. 오늘은 그 이야기를 좀 해보려 합니다.
비교 대상은 크게 두 덩어리로 나눴습니다. 초기 작품들, 그러니까 플란다스의 개부터 살인의 추억, 괴물, 마더까지. 그리고 후기 작품들, 설국열차부터 옥자, 기생충까지. 이렇게 두 묶음으로 놓고 보니까 확실히 다른 무언가가 느껴졌습니다. 제 기억이 맞다면 말이죠.
🌿 초기 봉준호 — 골목 냄새가 나는 영화들
낮고, 좁고, 습한 공간들
플란다스의 개를 보셨습니까. 제 기억이 맞다면 이게 장편 데뷔작입니다. 솔직히 말하면, 이 영화 처음 봤을 때 ‘이게 그 봉준호 감독 영화 맞아?’ 싶었습니다. 그만큼 투박합니다. 어설픈 구석도 있고. 근데 두 번째 보니까 달리 보이더군요. 아파트 지하, 개 사라지는 에피소드, 이웃 간의 묘한 긴장감. 이게 나중에 기생충 지하실로 이어진다는 게 느껴지는 겁니다. 공간을 쓰는 방식이 비슷합니다. 지상과 지하, 위와 아래. 처음부터 이 사람은 그 이분법을 갖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살인의 추억은 아마 많이들 아실 겁니다. 이건 진짜 대단한 영화입니다. 제가 직장 다닐 때 처음 봤는데, 그때는 그냥 범죄수사 영화로만 봤습니다. 사건 못 잡고 끝나는 답답한 영화. 근데 퇴직하고 다시 보니까 달랐습니다. 이게 단순한 미제사건 영화가 아닌 겁니다. 형사들이 무능하고, 시스템이 무능하고, 결국 평범한 사람들이 그 무능함 속에서 짓밟히는 이야기입니다. 30년 직장생활 하면서 그런 시스템의 무능함을 지겹도록 봐온 저한테는 더 다르게 와 닿았습니다. 회의록 쌓아두고 아무것도 안 바뀌던 그 조직의 냄새가 났다고 하면 이상하게 들릴까요.
괴물도 다시 봤습니다. 이 영화를 처음 봤을 때는 한강에 괴물 나오는 장르물로만 생각했습니다. 근데 초기 봉준호 영화들을 다 보고 나서 다시 보니까, 이 가족이 얼마나 무력하고 주변부에 있는지가 보이는 겁니다. 아버지는 게으르고, 아들은 한량이고, 딸은 여자라서 차별받고, 삼촌은 실패한 운동권 출신. 이 가족이 딱 봉준호 감독이 초기에 계속 그려온 그 사람들입니다. 영웅이 아닌 사람들. 능력도 없고 빽도 없는 사람들.
마더는 솔직히 좀 무서웠습니다. 김혜자 선생님 연기가 무서운 게 아니라, 이야기 구조가 무서웠습니다. 자식을 위해서라면 뭐든 하는 어머니의 사랑이, 어느 순간부터 그게 사랑인지 집착인지 공포인지 모르게 되어버리는 겁니다. 초기 작품들 중에 가장 어두웠습니다. 그리고 어떤 면에서 가장 솔직한 영화였습니다.
초기 봉준호 영화들의 공통점
이 영화들을 쭉 보면서 제가 느낀 공통점이 몇 가지 있었습니다.
- 공간이 좁습니다. 골목, 아파트, 지하, 한강변의 허름한 가게. 넓고 화려한 공간이 없습니다.
- 영웅이 없습니다. 주인공이 문제를 해결하고 박수받는 구조가 아닙니다. 오히려 실패하거나, 살아남거나, 더 이상해지거나.
- 국가와 시스템이 항상 적입니다. 미군이든, 경찰이든, 병원이든. 개인을 보호해줘야 할 시스템이 개인을 짓밟습니다.
- 웃음이 있는데 그 웃음이 불편합니다. 장르물의 문법을 따르다가 갑자기 현실의 민낯을 들이미는 방식.
이 특징들이 초기 봉준호를 만드는 핵심 재료인 것 같습니다. 흙냄새, 골목냄새, 땀냄새. 그런 것들이 납니다.
🚂 후기 봉준호 — 스케일은 커졌는데, 무언가 달라진 것
세계가 넓어졌습니다. 공기가 달라졌습니다.
설국열차부터는 확실히 뭔가 다릅니다. 공간이 열차 하나이긴 한데, 그 안에서 세계 전체를 압축해 보여주는 방식이 초기 작품들과는 다른 결입니다. 봉준호 감독이 외국 배우들과 영어로 작업을 하면서, 뭔가 의식적으로 ‘보편적인 언어’를 찾아간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정확하진 않지만, 그 영화를 보면서 저는 계속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이게 한국 영화인가, 아닌가. 이상한 질문이지만, 초기 작품들을 다 보고 나서 설국열차를 보면 그 질문이 자연스럽게 떠오릅니다.
옥자는 또 달랐습니다. 사실 이 영화를 처음 봤을 때 저는 별로였습니다. 돼지 같은 동물이 나오고, 넷플릭스 영화이고, 뭔가 CGI 동물 영화 같은 느낌이라서. 근데 세 번 정도 보고 나서는 생각이 바뀌었습니다. 이 영화도 결국 초기 봉준호와 같은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자본이 어떻게 생명을 상품으로 만드는가. 근데 그 이야기를 하는 방식이 훨씬 매끄럽고, 세련됐습니다. 골목 냄새 대신 기업 유리빌딩 냄새가 납니다. 진짜로.
기생충은 뭐라고 해야 할까요. 저는 이 영화가 초기 봉준호와 후기 봉준호를 잇는 다리 같은 영화라고 생각합니다. 공간이 다시 골목으로 왔습니다. 반지하가 나오고, 저택이 나오고, 지하실이 나옵니다. 근데 연출은 완전히 성숙한 후기 봉준호의 방식입니다. 이 두 가지가 합쳐지니까 그게 세계에서 통한 게 아닌가 싶었습니다. 제 나름의 해석입니다만.
후기 봉준호 영화들의 특징
- 공간이 넓어졌습니다. 열차, 뉴욕, 서울 고급 주택. 세계가 커졌습니다.
- 계급 구조가 더 선명해졌습니다. 초기엔 암시했다면, 후기엔 아예 대놓고 그립니다.
- 장르 문법이 더 정교해졌습니다. 관객을 가지고 노는 기술이 느는 게 느껴집니다.
- 감정선이 예전보다 덜 거칩니다. 이게 장점이기도 하고, 어떤 면에서는 아쉽기도 합니다.
🔍 직접 순서대로 보고 나서 알게 된 차이들
솔직히 말씀드리면, 처음에 이 프로젝트(제 마음속의 프로젝트)가 잘 안 됐습니다. 플란다스의 개 보다가 중간에 졸았습니다. 살인의 추억은 너무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해서 흘려봤습니다. 그냥 유명한 장면만 확인하는 식으로. 근데 그렇게 보니까 아무것도 안 보이더군요.
다시 처음부터, 이번엔 메모하면서 봤습니다. 아내가 뭐 하냐고 물어볼 때마다 “영화 공부”라고 했더니 한심하다는 눈빛으로 봤습니다만. 뭐, 그래도 계속했습니다.
그렇게 보고 나서 가장 크게 느낀 차이는 이겁니다. 초기 봉준호는 냄새가 납니다. 후기 봉준호는 구조가 보입니다. 이게 제가 말할 수 있는 가장 솔직한 표현입니다.
초기 작품들은 보는 동안 뭔가 불편하고, 눅눅하고, 피부에 닿는 느낌이 있었습니다. 살인의 추억에서 비 맞으며 뛰는 형사들 보면 저도 왠지 축축한 기분이 들고. 마더에서 김혜자 선생님이 아들 대신 뭔가를 하는 장면들 보면 저도 모르게 몸이 긴장되고.
후기 작품들은 다릅니다. 설국열차나 기생충은 보는 동안 머리가 돌아가는 느낌이 납니다. 이 장면이 왜 이렇게 찍혔지, 이 대사가 뭘 말하는 거지, 저 공간 배치가 뭘 상징하는 거지. 그런 생각을 하면서 보게 됩니다. 훨씬 세련되고 계산된 영화들입니다.
아쉬운 점도 있습니다. 후기로 갈수록 뭔가 날것의 느낌이 줄어들었습니다. 플란다스의 개나 살인의 추억에는 완성도라고 하기엔 어설픈 구석이 있는데, 그 어설픔 안에 진짜 감정이 있었습니다. 후기 작품들은 너무 잘 만들어져서 오히려 그 거칠고 날카로운 감정이 약간 다듬어진 느낌이 듭니다. 보석을 너무 잘 세공하면 원석의 질감이 사라지는 것처럼요. 이건 제 개인적인 아쉬움입니다만.
🎯 어떤 분께 초기 작품이 맞는지, 후기 작품이 맞는지
초기 봉준호 영화가 맞는 분들
저처럼 조직생활을 오래 하신 분들, 시스템에 짓눌린 경험이 있는 분들한테는 초기 봉준호가 훨씬 더 세게 들어올 것 같습니다. 살인의 추억에서 형사들이 아무리 뛰어도 안 잡히는 그 무력함, 그게 이상하게 직장생활이랑 겹쳐 보이거든요. 보고하고, 결재받고, 다시 보고하고, 아무것도 안 바뀌는 그 느낌.
또 영화를 ‘잘 만든 작품’보다 ‘무언가 느껴지는 작품’으로 좋아하시는 분들한테도 초기 작품이 맞을 것 같습니다. 완성도보다 체온이 높은 영화들이니까요.
후기 봉준호 영화가 맞는 분들
반대로 영화를 정교하게 분석하면서 보는 걸 즐기시는 분들, 혹은 영화를 처음 접하는 젊은 분들한테는 후기 작품이 더 편하게 들어올 것 같습니다. 기생충은 특히 처음 봉준호를 접하는 분들한테 입문용으로 최고라고 생각합니다. 이야기가 워낙 명확하고, 재미있고, 한 번 보면 두 번 보고 싶어지는 구조로 돼 있으니까요.
그리고 요즘처럼 OTT로 영화를 보시는 분들, 혼자서 조용히 보시는 분들한테는 설국열차나 옥자도 꽤 좋습니다. 생각할 거리가 많은 영화들이라 혼자 보고 나서 오래 곱씹게 됩니다.
✍️ 마무리하면서 — 감독 한 명의 전작을 본다는 것
퇴직하고 시간이 생기면서 이런 걸 할 수 있게 됐습니다. 솔직히 말하면 직장 다닐 때는 꿈도 못 꿨을 일입니다. 영화 감독 한 명의 작품을 처음부터 순서대로 다 본다는 게. 그냥 틀어놓는 것도 아니고, 메모하면서, 며칠 텀 두면서, 비교하면서.
근데 해보니까 이게 꽤 특별한 경험이었습니다. 봉준호라는 감독이 어떻게 성장했는지, 뭘 계속 갖고 가고, 뭘 버리고, 뭘 새로 가져왔는지. 그걸 보는 게 마치 한 사람의 30년 일기를 처음부터 읽는 것 같았습니다.
저도 30년 직장생활을 했습니다. 처음에 어떤 마음으로 일을 시작했는지, 어느 순간부터 그게 달라졌는지, 뭘 잃고 뭘 얻었는지. 봉준호 감독 영화를 보면서 그런 생각이 겹쳐서 들었습니다. 이상한 감상일 수 있겠습니다만.
한 가지만 더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봉준호 감독 작품을 순서대로 보면 단순히 영화가 좋아지는 게 아니라, 그 사람이 보입니다. 그게 전작 감상의 가장 큰 재미인 것 같습니다. 영화 한 편 한 편을 보는 것과 전부를 순서대로 보는 것은, 나무 하나를 보는 것과 숲 전체를 걷는 것만큼 다른 경험입니다.
시간이 되신다면, 처음부터 한번 순서대로 보실 것을 권해드립니다. 유명한 장면만 알고 있던 영화가 완전히 다르게 보이는 경험, 꽤 값지다고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