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퇴직하고 나서야 제대로 보게 된 히치콕
퇴직하고 나서 진짜 좋았던 게 뭐냐고 물으면, 저는 망설임 없이 “낮에 영화 볼 수 있게 된 것”이라고 답합니다. 30년 넘게 직장 다니면서 영화는 늘 주말 저녁이나 겨우 짬 내서 보는 거였거든요. 근데 퇴직하고 나니까 오전에 커피 한 잔 내려놓고 아무 방해 없이 두 시간짜리 영화 한 편 온전히 볼 수 있게 됐습니다. 그게 이렇게 좋을 줄 몰랐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스트리밍 플랫폼 추천 알고리즘이 히치콕 감독 영화를 하나 띄워줬습니다. 제목은 《현기증》이었는데, 솔직히 말하면 처음엔 “오래된 영화라 재미없겠지” 싶었습니다. 흑백도 아닌 컬러 영화긴 했는데, 화질도 낡고 배우들 연기도 좀 과장된 것 같아 보여서요. 근데 막상 보다 보니까 화면에서 눈을 못 떼는 겁니다. 그 이후로 히치콕 영화를 줄줄이 찾아보게 됐고, 요즘 흥행 영화들과 비교하다 보니 이 글을 쓰게 됐습니다.
🎭 히치콕이 말하는 서스펜스란 뭔가
히치콕 감독이 직접 인터뷰에서 했던 말이 있습니다. 제 기억이 맞다면, “폭탄이 터지는 건 서프라이즈고, 폭탄이 언제 터질지 관객이 알면서 기다리는 게 서스펜스”라고 했을 겁니다. 이 말 하나가 히치콕 영화 전체를 설명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요즘 영화들은 반대입니다. 아무것도 알려주지 않고 갑자기 쾅, 충격을 줍니다. 관객이 놀라게 만드는 거죠. 근데 히치콕은 오히려 관객한테 다 알려줍니다. “저 테이블 밑에 폭탄이 있어. 저 사람들은 모르고 밥 먹고 있어.” 그 상태에서 대화 장면을 쭉 이어가는 겁니다. 관객 입장에서는 속이 터지죠. 빨리 피하라고 소리 지르고 싶어지는 그 감각. 그게 서스펜스입니다.
🔍 히치콕 서스펜스 기법, 구체적으로 뜯어보면
첫 번째 – 맥거핀(MacGuffin)
맥거핀이라는 용어, 영화 좀 보신 분들은 들어봤을 겁니다. 히치콕이 즐겨 쓴 장치인데, 쉽게 말하면 “모두가 간절히 원하지만 사실 내용은 중요하지 않은 것”입니다. 《싸이코》에서 주인공이 훔쳐 달아나는 돈뭉치가 대표적입니다. 영화 초반에 그 돈이 얼마나 중요한 것처럼 포장되는지, 관객은 그 돈이 어떻게 될지 걱정하면서 따라가게 됩니다. 근데 영화 중반 이후엔 그 돈이 거의 등장하지도 않습니다. 관객을 이야기 속으로 끌어들이는 미끼였던 거죠.
요즘 영화들도 맥거핀을 씁니다. 근데 제가 느끼기엔 요즘은 맥거핀을 너무 노골적으로 쓰거나, 결말에 가서 꼭 설명을 다 해주려 합니다. 히치콕은 그냥 흘려보냈는데 말이죠.
두 번째 – 카메라가 말하게 하는 방식
히치콕 영화에서 대사는 생각보다 적습니다. 정확하진 않지만, 제가 여러 편을 보면서 느낀 건 카메라 구도와 편집이 대사보다 훨씬 많은 걸 설명한다는 겁니다. 《이창》을 예로 들면, 다리를 다쳐 창문 밖만 바라보는 주인공 시선을 카메라가 그대로 따라갑니다. 관객도 그 방에 갇혀있는 기분이 드는 거죠. 클로즈업, 줌, 시선의 방향 하나하나가 다 계산된 겁니다.
요즘 영화는 반대로 설명이 너무 많습니다. 등장인물이 자기 감정을 직접 말하고, 자기 상황을 대사로 설명합니다. 히치콕이 카메라 하나로 보여줬던 걸 요즘은 대사 다섯 줄로 설명하는 느낌이랄까요. 이건 아쉬운 점이기도 합니다. 관객을 좀 믿어줬으면 하는 생각이 듭니다.
세 번째 – 평범한 일상 속에 위험 심기
히치콕이 무서운 이유가 이겁니다. 귀신도 없고, 괴물도 없습니다. 그냥 샤워하다가 죽고, 새한테 습격당하고, 기차에서 낯선 사람을 만납니다. 일상적인 공간에서 일상적인 행동을 하다가 위험에 빠지는 거죠. 《새》를 보면서 제가 진짜 며칠 동안 새를 이상하게 봤던 기억이 납니다. 그게 히치콕의 힘입니다.
요즘 공포나 스릴러 영화들은 설정 자체가 이미 비일상적인 경우가 많습니다. 폐건물, 외딴섬, 특수한 직업군… 물론 재미있습니다. 근데 히치콕처럼 내 일상이 위협받는 느낌은 훨씬 덜합니다.
네 번째 – 악당을 매력적으로 만드는 법
히치콕 영화에서 악당은 이상하게 좋아 보입니다. 친절하고, 웃고, 논리적입니다. 《열차 안의 낯선 자들》의 브루노가 그렇고, 《싸이코》의 노먼 베이츠가 그렇습니다. 관객이 자기도 모르게 악당 편을 들고 싶어지는 그 불편한 감각. 히치콕은 그걸 의도적으로 만들었습니다.
요즘 영화도 입체적인 악당을 만들려고 노력하는 건 압니다. 근데 히치콕처럼 악당의 매력이 관객을 도덕적으로 흔들어놓는 경우는 보기 드문 것 같습니다.
⚠️ 알아두면 좋은 점, 그리고 아쉬운 점
히치콕 영화를 요즘 처음 보시는 분들께 한 가지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초반 20분은 지루하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사실 저도 처음엔 “이게 뭐지?” 하고 거의 끄려다가 참은 적이 몇 번 있습니다. 히치콕은 긴장감을 천천히 쌓아올리는 방식을 씁니다. 요즘 영화처럼 처음 5분 안에 잡아끄는 방식이 아닙니다. 그 템포에 익숙해지는 데 두세 편 정도 보셔야 합니다.
그리고 아쉬운 점도 있습니다. 히치콕 영화에서 여성 캐릭터들은 지금 기준으로 보면 너무 수동적이고 대상화된 경우가 많습니다. 이건 시대적 한계이기도 하지만, 보다 보면 불편한 장면들이 꽤 나옵니다. 그 점은 감안하고 보셔야 합니다.
👥 이런 분께 특히 추천합니다
- 요즘 영화들이 너무 자극적이고 피곤하다고 느끼시는 분
- 영화 보고 나서 “이 장면은 왜 이렇게 찍었지?” 생각하는 걸 즐기시는 분
- 스릴러나 공포를 좋아하지만 잔인한 건 못 보시는 분
- 직접적인 공포보다 심리적 긴장감을 좋아하시는 분
반대로, 빠른 전개와 강한 자극을 원하신다면 처음엔 좀 답답하실 수 있습니다.
✍️ 마무리하며
30년 직장생활 동안 “바빠서 못 봤다”는 핑계로 미뤄뒀던 영화들을 이제야 보고 있습니다. 히치콕도 그중 하나였는데, 이렇게 늦게 제대로 만날 줄 몰랐습니다. 요즘 영화도 좋습니다. 기술도 좋아졌고 이야기도 다양해졌습니다. 근데 히치콕을 보고 나면 영화라는 게 카메라 하나, 편집 하나, 침묵 하나로 얼마나 많은 걸 할 수 있는지 다시 느끼게 됩니다. 제 나이 되면 좀 느리고 고전적인 것도 충분히 즐길 수 있게 됩니다. 아직 히치콕 안 보신 분들, 한 편만 참고 보시면 그다음은 알아서 찾아보게 될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