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준호 감독 영화를 순서대로 다시 보며 느낀 것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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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퇴직하고 나서야 제대로 본, 봉준호 감독의 영화들

퇴직하고 나서 한동안은 솔직히 뭘 해야 할지 몰랐습니다. 30년 넘게 매일 아침 정해진 시간에 일어나서 넥타이 매고 나갔던 사람이, 갑자기 아무 일정도 없는 하루를 맞이하니까요. 처음 한두 달은 그냥 멍하게 TV 보고 산책하고, 그게 전부였습니다.

그러다가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예전에 영화관 가고 싶어도 야근 때문에 못 봤던 영화들이 얼마나 많았나, 하고요. 봉준호 감독 이야기를 처음 들었을 때가 기억납니다. 제 기억이 맞다면, 직장 후배가 “과장님, 기생충 꼭 보세요”라고 했을 때 저는 결국 극장에서 못 보고 나중에 TV로 봤거든요. 그것도 중간에 전화 받으면서. 제대로 본 게 아니었죠.

그래서 결심했습니다. 봉준호 감독 영화를 처음 작품부터 순서대로 다시 한 번 제대로 보자. 커피 한 잔 내려놓고, 핸드폰은 무음으로 해두고, 진짜로요. 이 글은 그렇게 두 달 가까이 혼자 감독의 필모그래피를 훑고 나서 느낀 것들을 적어본 것입니다.


📼 처음부터 끝까지, 한 감독의 세계를 따라가 보니

봉준호 감독 영화를 순서대로 본다는 게, 생각보다 쉽지 않았습니다. 어떤 작품은 스트리밍 서비스에 없어서 중고 DVD를 구해야 했고, 어떤 건 화질이 너무 낮아서 집중이 흐트러지기도 했습니다. 근데 막상 해보니까, 그 불편함이 오히려 좋았습니다. 마치 오래된 일기장을 첫 장부터 넘기는 기분이랄까요.

초기 단편이나 습작 격의 작품부터 시작해서, 데뷔 장편을 보고, 그다음 작품으로 넘어갔습니다. 처음 몇 편을 보다 보니 흥미로운 게 있었습니다. 봉준호 감독 영화에는 반복되는 공간이 있더라고요. 계단. 반지하. 경사진 지형. 처음엔 그냥 우연인가 했는데, 나중에 보니 이게 그냥 배경이 아니더라고요. 높은 곳과 낮은 곳의 이야기를 항상 하고 싶었던 감독인 거죠.

저는 직장 다닐 때 항상 중간 어딘가에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임원은 아니고, 그렇다고 신입도 아닌. 그 어정쩡한 자리에서 위도 보고 아래도 봤던 경험이 있으니까, 봉준호 감독이 계속 그 ‘경계’를 이야기한다는 게 남다르게 느껴졌습니다. 그냥 가난한 사람 불쌍하다는 이야기가 아니에요. 그 경계에 선 사람들이 어떻게 무너지고 어떻게 버티는지를 보여주는 거라고 느꼈습니다.

🐾 동물 이야기인데 동물 이야기가 아닌

괴물이나 옥자 같은 작품을 볼 때, 처음엔 솔직히 좀 낮게 봤습니다. 제 또래 분들은 아마 이해하실 겁니다. ‘무슨 괴물이 나오는 영화를, 어른이’ 이런 편견이 있었거든요. 근데 막상 보니까 전혀 달랐습니다.

괴물은 괴물 영화가 아니었습니다. 가족 이야기였고, 무능한 국가 이야기였고, 한강변 평범한 사람들 이야기였습니다. 제가 회사 다닐 때 황당한 지시 내려오면 그냥 따를 수밖에 없었던 경험이 있는데, 그 영화 보면서 그 답답함이 떠올랐습니다. 옥자는 더 했습니다. 다 보고 나서 한동안 멍하게 앉아 있었습니다. 아이와 동물의 관계인 줄 알았는데, 시스템 앞에 개인이 얼마나 작은지를 이야기하는 영화더라고요.

🚂 설국열차 – 한 공간에 세상이 다 들어있더라

설국열차는 제가 개봉 당시에 아내랑 봤던 기억이 있습니다. 그때는 “오, 볼 만하네” 정도였거든요. 근데 이번에 혼자 조용히 다시 보니까 완전히 다른 영화였습니다. 정확하진 않지만, 제가 그때 너무 피곤한 상태로 봤던 것 같습니다.

열차 칸이 곧 계층이잖아요. 앞칸으로 갈수록 먹고 살기 좋아지고, 뒤칸은 그냥 살아남는 거고. 그걸 보면서 제가 30년 다닌 회사 구조가 겹쳐 보이더라고요. 층층이 나뉜 사무실, 임원 전용 엘리베이터. 뭔가 씁쓸한 웃음이 나왔습니다. 다들 앞칸 가고 싶어서 안달인데, 사실 열차 자체가 문제인 거 아니냐는 질문을 영화가 던지는데. 그게 이번에 보니까 훨씬 크게 들렸습니다.


😊 좋았던 점들 – 한 감독을 따라가는 즐거움

  • 성장이 보인다는 것. 초기 작품과 나중 작품을 이어서 보면, 감독이 어떻게 자기 스타일을 만들어왔는지가 보입니다. 그게 감동적이었습니다. 저도 처음 입사했을 때와 퇴직할 때가 다른 사람이었던 것처럼, 감독도 한 편 한 편 쌓아온 거잖아요.
  • 각 영화가 서로 대화하는 느낌. 따로 보면 그냥 독립적인 작품들인데, 이어서 보면 어떤 주제들이 반복되고 심화되는 게 느껴집니다. 이게 필모그래피를 순서대로 보는 재미 중 제일 큰 것이었습니다.
  • 웃기면서 슬프다. 봉준호 감독 영화는 어두운 주제를 다루면서도 꼭 어딘가에서 웃음이 나옵니다. 근데 그 웃음이 씁쓸합니다. 이 독특한 감각이 전 편에 걸쳐 일관되게 있더라고요. 저는 그게 제일 인상적이었습니다.
  • 배우들이 다 산다. 주연뿐 아니라 단역까지 다 살아있는 느낌. 이게 어느 한 편에서만 그런 게 아니라 전체적으로 그렇습니다.

😔 아쉬웠던 점 – 솔직하게 말하자면

좋은 이야기만 하면 재미없죠. 솔직히 몇 가지 아쉬운 점도 있었습니다.

우선, 일부 작품은 메시지가 너무 앞에 나오는 느낌이 있었습니다. 영화를 보다가 “아, 감독이 이 말 하고 싶었구나”가 너무 빨리, 너무 뚜렷하게 보이면 솔직히 좀 지루해지더라고요. 특히 후반부로 갈수록 그런 경향이 있었습니다. 저처럼 영화 전문가가 아닌 일반 관객은 그 무게감이 가끔 부담스럽게 느껴지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또 하나. 영어권 배우들이 등장하는 작품에서는 어딘가 어색함이 있었습니다. 한국 배우들이 보여주는 그 세밀한 감정 연기가 익숙해진 상태에서 보다 보니, 같은 연출인데 다르게 느껴지는 부분이 있더라고요. 이게 제 감상이 틀렸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솔직히 그렇게 느꼈습니다.

마지막으로, 순서대로 본다고 해서 꼭 좋은 건 아닐 수 있다는 점도 말해두고 싶습니다. 초기 작품 중에는 지금 봤을 때 기술적으로 아쉬운 부분이 있어서, 처음 보는 분들한테는 진입장벽이 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저는 이미 어느 정도 익숙한 상태로 다시 본 거라 괜찮았지만요.


❓ 자주 받는 질문들 – 주변 친구들이 물어보는 것들

Q. 어떤 작품부터 보는 게 좋을까요?

처음 보시는 분이라면 굳이 순서대로 안 보셔도 됩니다. 저는 순서대로 본다는 목표가 있었으니까 그렇게 했는데, 처음 접하시는 분들은 솔직히 상대적으로 접근하기 쉬운 작품부터 시작하는 게 나을 수 있습니다. 단, 여기서 말하는 ‘쉽다’는 게 수준이 낮다는 뜻이 아니에요. 그냥 첫인상이 좀 더 친절하다는 거죠.

Q. 혼자 보는 게 나을까요, 같이 보는 게 나을까요?

이건 작품마다 다릅니다. 저는 혼자 봐서 좋았는데, 특히 후반부에 무거운 주제를 다루는 작품들은 보고 나서 누군가랑 이야기 나눌 수 있으면 더 좋을 것 같더라고요. 혼자 보고 혼자 멍하니 있으면 좀 오래 가거든요. 그게 꼭 나쁜 건 아니지만요.

Q. 봉준호 감독 영화, 어떤 분들께 특히 추천하시나요?

저처럼 오랫동안 직장 생활 하면서 세상 돌아가는 거 옆에서 봐온 분들한테 특히 추천합니다. 불합리한 것들을 그냥 눈 감고 지내온 경험이 있는 분들, 높은 곳과 낮은 곳 사이 어딘가에서 살아온 분들이라면 더 깊이 느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영화를 오락으로만 보는 걸 넘어서, 뭔가 좀 더 생각하게 만드는 영화를 찾는 분들이라면 분명 잘 맞을 것입니다.


✍️ 마무리하며 – 두 달간의 봉준호 감독 필모그래피 여행

두 달 가까이 한 감독의 작품을 처음부터 쭉 따라가 봤습니다. 퇴직하고 나서 이렇게 뭔가에 몰두해본 게 처음이었습니다. 그게 영화여서 다행이었다는 생각도 듭니다.

봉준호 감독 영화가 좋은 건, 보고 나서 뭔가 남기 때문입니다. 장면이 남고, 대사가 남고, 가끔은 묘하게 불편한 감정이 며칠씩 남기도 합니다. 그 불편함이 나쁜 게 아니에요. 오히려 그게 살아있다는 증거 같기도 합니다. 영화가 그런 역할을 해줄 수 있다는 게, 저한테는 새삼스러운 발견이었습니다.

퇴직하고 무료하다는 분들, 혹은 오랫동안 제대로 영화 한 편 못 봤다는 분들, 한번 해보시길 권합니다. 꼭 봉준호 감독이 아니더라도, 자기가 좋아하는 감독 한 명 골라서 처음 작품부터 쭉 따라가 보는 경험은 꽤 묵직한 무언가를 남겨줄 것입니다.

저는 다음엔 어느 감독으로 갈지 지금 고민 중입니다. 오랜 친구 같은 이 시간이, 당분간 계속될 것 같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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