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영화를 고르는 나만의 기준이 생긴 계기

🎬 좋은 영화를 고르는 나만의 기준이 생긴 계기

퇴직하고 나서 제일 먼저 한 게 뭔지 아십니까. 넷플릭스 구독이었습니다. 30년 넘게 직장 다니면서 영화 한 편 제대로 못 봤다 싶어서, 이제라도 실컷 보자 싶었던 겁니다. 근데 막상 앱을 켜놓고 보면, 뭘 봐야 할지 몰라서 30분 동안 썸네일만 구경하다 그냥 TV를 끈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그게 처음엔 너무 이상했습니다. 보고 싶어서 구독해놨는데, 정작 뭘 볼지 모르겠는 그 기분. 지금 생각해보면 제가 그동안 영화 취향이라는 게 없었던 겁니다.

그렇게 한 석 달쯤 헤맨 것 같습니다. 평점 높다는 거 봤다가 졸고, 친구가 재밌다는 거 봤다가 중간에 껐습니다. 아들이 추천해준 영화는 뭔 말인지 하나도 모르겠고. 그러다 어느 날 우연히 오래된 일본 영화 한 편을 보고 나서, 한 시간 넘게 멍하게 앉아 있은 적이 있었습니다. 그때 처음으로 “아, 이게 내가 찾던 거구나” 싶었습니다. 그 경험이 계기가 됐습니다. 그 이후로 제가 왜 그 영화에 반응했는지를 거꾸로 분석하기 시작했고, 그러면서 조금씩 나만의 기준이 생겼습니다. 오늘은 그 이야기를 좀 해볼까 합니다.


🤔 처음엔 평점을 믿었습니다, 그게 실수였습니다

솔직히 말하면, 처음엔 평점이 전부인 줄 알았습니다. 어디 보면 별점 4.2면 좋은 거고, 3점대면 별로인 거다, 뭐 그런 식으로 이해하고 있었습니다. 직장 다닐 때도 업무에서 숫자로 평가하는 게 몸에 배다 보니, 영화도 그렇게 보게 된 것 같습니다.

근데 막상 해보니까 전혀 아니더라고요. 평점 높은 영화를 봤는데 뭔가 공허하게 느껴지는 경우가 꽤 있었습니다. 반대로 평점이 그저 그런 영화인데 보고 나서 이상하게 오래 기억에 남는 것들도 있었습니다. 제 기억이 맞다면, 제가 그때 본 어떤 영화는 평점이 꽤 높았는데 보고 나서 기분이 좀 이상했습니다. 뭔가 과하게 자극적이었달까요. 반면에 조용한 농촌 배경의 한국 영화 하나는 별점이 그리 높지 않았는데, 보고 나서 밥을 먹으면서도 계속 장면들이 떠올랐습니다.

그때 깨달은 게 하나 있습니다. 평점은 “많은 사람들이 좋아한 정도”를 나타내는 거지, “내가 좋아할 가능성”을 알려주는 게 아니라는 겁니다. 굉장히 단순한 말이지만, 저는 퇴직하고 나서야 그걸 몸으로 느꼈습니다. 아마 그전엔 영화를 워낙 안 봤으니까 그 차이를 몰랐겠지요.


🧭 내가 세운 영화 고르기 기준, 네 가지

① 보고 난 뒤에 말하고 싶어지는 영화인가

이게 제 기준 중에서 제일 핵심입니다. 영화를 다 보고 나서, 누군가에게 이 이야기를 꺼내고 싶다는 충동이 생기는 영화가 있습니다. 집사람한테 “오늘 영화 봤는데…” 하고 말문을 여는 경우가 있고, 반대로 뭘 봤는지조차 다음 날 잊어버리는 경우가 있습니다. 저는 전자가 좋은 영화라고 생각하게 됐습니다.

이걸 기준으로 삼게 된 데는 이유가 있습니다. 직장 생활을 오래 하다 보면 회의 자리에서 잘 기억에 남는 발표가 있고, 듣고 나서 바로 날아가는 발표가 있지 않습니까. 제 경험상 오래 남는 건 정보가 많아서가 아니라, 뭔가 마음에 걸리는 게 있어서였습니다. 영화도 마찬가지더라고요. 뭔가 마음에 걸리는 게 있는 영화, 그게 좋은 영화였습니다.

처음엔 이 기준을 잘 몰라서 그냥 “재밌었다 / 재미없었다”로만 나눴는데, 어느 순간부터 “말하고 싶다 / 아니다”로 구분하기 시작하니까 제 취향이 훨씬 뚜렷해졌습니다.

② 등장인물 중에 내 나이대가 있는가

이건 좀 개인적인 기준이라 민망하기도 합니다만, 솔직히 제일 크게 작용합니다. 58살이 되고 나서 보면, 20대 주인공들이 사랑하고 헤어지는 이야기에 예전처럼 감정이입이 잘 안 됩니다. 물론 잘 만든 영화면 나이 상관없이 좋기도 합니다만, 처음부터 끌리는 건 역시 내 또래 인물이 나오는 영화더라고요.

중년 남자가 은퇴 후 어떻게 살아가는지, 오래된 부부 사이에 어떤 감정이 흐르는지, 늙은 부모와 자식 사이의 복잡한 감정. 이런 걸 다루는 영화들이 요즘 저한테는 훨씬 잘 들어옵니다. 사실 저도 처음엔 그걸 인정하기가 좀 쑥스러웠습니다. 나이 들어서 공감할 수 있는 영화만 찾는다는 게 뭔가 시야가 좁아진 것 같기도 하고. 근데 생각해보니까, 독자가 자기 경험과 연결되는 책을 고르는 건 당연한 일이잖아요. 영화도 그렇게 생각하기로 했습니다.

정확하진 않지만, 이 기준을 세우고 나서 영화 고르는 데 드는 시간이 절반 이하로 줄어든 것 같습니다. 그냥 검색할 때부터 “중년”, “노년”, “가족” 이런 키워드를 같이 넣거든요. 그러면 쓸데없이 고민하는 시간이 많이 줄어듭니다.

③ 장면보다 침묵이 많은 영화인가

이건 제가 제일 나중에 깨달은 기준입니다. 처음엔 표현하기가 어려웠는데, 지금은 이렇게 말합니다. 대사 없이 흐르는 장면, 배우의 표정만 길게 잡는 장면, 음악도 별로 없이 그냥 주인공이 걸어가는 장면. 그런 영화들이 저한테는 훨씬 오래 남더라고요.

직장 다닐 때 회의가 너무 많다 보니까, 말이 많은 것에 좀 지쳐있는 게 아닐까 싶기도 합니다. 퇴직하고 나서 집에서 조용히 있는 걸 좋아하게 됐는데, 영화도 비슷하게 조용하고 여백이 많은 걸 좋아하게 된 것 같습니다. 이 취향이 나이 탓인지, 아니면 원래 이런 취향이었는데 몰랐던 건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아무튼 이걸 기준으로 삼으면 장르 구분이 어느 정도 됩니다. 액션이나 코미디는 애초에 대사와 소리가 많습니다. 반면에 드라마나 감독 특유의 색깔이 강한 영화들은 침묵을 잘 쓰는 경우가 많습니다. 장르 자체보다 그 안의 “밀도”를 보는 편이라고 하면 맞을 것 같습니다.

④ 주인공이 무언가를 포기하거나 잃는 이야기인가

이 기준이 생긴 건 퇴직 직후였습니다. 그때 제 심정이 좀 복잡했거든요. 해방감도 있었지만, 동시에 뭔가를 잃어버린 기분도 있었습니다. 30년 동안 다닌 회사, 그 안의 직함과 역할, 그게 없어지고 나서 처음 몇 달은 좀 허했습니다.

그때 보게 된 영화들이 우연히 비슷한 주제를 담고 있었습니다. 꿈을 포기한 사람, 가족을 잃은 사람, 오래된 것들이 사라지는 걸 지켜보는 사람. 그런 이야기들이 이상하게 위로가 됐습니다. 뭔가를 잃었다는 게 내 이야기만이 아니라는 느낌이랄까요. 그러면서 그런 영화들을 의식적으로 더 찾아보게 됐습니다.

해피엔딩이냐 아니냐보다는, 그 상실의 과정을 얼마나 솔직하게 다루는지가 중요한 것 같습니다. 어설프게 위로하려는 영화보다, 그냥 같이 앉아서 슬퍼해주는 영화가 더 좋습니다. 그게 오히려 더 위로가 되더라고요.


⚠️ 이 기준대로 해보니까 아쉬운 점도 있었습니다

이 기준들이 저한테는 꽤 잘 맞는데, 솔직히 단점도 있습니다. 몇 가지 말씀드리겠습니다.

  • 시야가 좁아질 수 있습니다. 저처럼 중년 등장인물을 기준으로 삼으면, 젊은 감독들의 신선한 작품을 자연스럽게 놓치게 됩니다. 나중에 보면 “이런 게 있었구나” 싶어서 아까울 때가 있습니다. 기준이 너무 단단해지면 그게 오히려 발목을 잡을 수 있습니다.
  • 함께 보기가 어렵습니다. 저 혼자 볼 때야 기준대로 고르면 되는데, 집사람이나 아들이랑 같이 볼 때는 제 기준이 전혀 안 통합니다. 집사람은 로맨스가 있어야 하고, 아들은 자기가 고른 거 아니면 안 보려고 합니다. 그때는 기준을 내려놓고 그냥 타협하는 편입니다. 기준이 있다고 해서 모든 상황에 적용되는 건 아니더라고요.
  • 처음 보는 감독 영화는 여전히 어렵습니다. 나만의 기준이 생겨도, 생전 처음 접하는 감독의 영화는 예측이 안 됩니다. 그냥 도박처럼 봐야 하는데, 그게 잘 안 맞을 때는 꽤 허탈합니다. 한 시간 반을 투자했는데 아무것도 안 남는 기분, 그게 가끔은 꽤 피곤하게 느껴집니다.

그래서 저는 처음 보는 감독 영화를 고를 때는 한 가지 방법을 씁니다. 그 영화에 대한 리뷰가 아니라, 감독 인터뷰를 찾아서 먼저 읽는 겁니다. 감독이 무슨 말을 하는지, 어떤 생각을 가진 사람인지를 먼저 보면 영화의 분위기가 어느 정도 가늠이 됩니다. 물론 항상 맞는 건 아닙니다만, 이게 그나마 제일 실패가 적었습니다.


🙋 이런 분들께 특히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제 이야기가 누구에게나 맞는 건 아닙니다. 제 기준은 제 나이, 제 경험, 제 감정 상태에서 나온 겁니다. 근데 비슷한 처지에 계신 분들께는 조금 도움이 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 퇴직 후 영화로 시간을 채우려는 분. 무작정 평점 높은 것만 골라봤더니 허무했다, 그런 경험이 있으신 분이라면 한번 자신만의 기준을 세워보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저처럼 시행착오를 거치면서 기준이 잡히는 건데, 그 과정 자체가 꽤 재미있기도 합니다.
  • 영화를 많이 보고 싶은데 막상 고르기가 힘든 분. 콘텐츠가 너무 많아진 요즘, 오히려 뭘 봐야 할지 모르는 분들이 많을 것 같습니다. 그럴 때 “이것 아니면 저것” 기준을 몇 가지 갖고 있으면 선택이 훨씬 쉬워집니다.
  • 뭔가 감정적으로 정리가 필요한 시기를 지나고 계신 분. 퇴직, 이사, 자녀 독립, 가까운 사람을 잃은 후. 그런 시기에 영화가 꽤 위로가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단, 아무 영화나 보면 오히려 더 공허해질 수도 있습니다. 그럴 때일수록 자기한테 맞는 영화를 고르는 기준이 있으면 좋습니다.

✍️ 마무리하면서

지금은 영화를 고를 때 예전처럼 30분씩 헤매지 않습니다. 물론 가끔 기준을 벗어난 영화를 봐서 실망할 때도 있습니다. 그래도 그게 나쁘진 않습니다. 실망을 통해서도 내 기준이 다듬어지는 것 같거든요.

한 가지 더 말씀드리고 싶은 게 있습니다. 나만의 기준이라는 게 거창한 게 아닙니다. 저처럼 “이 영화 보고 나서 말하고 싶어지는가” 같은 단순한 질문 하나로도 충분합니다. 그 작은 기준 하나가 생기면, 나머지는 보다 보면 자연스럽게 쌓입니다. 제가 그랬습니다.

58살에 뒤늦게 영화 취향이라는 걸 갖게 됐습니다. 좀 늦은 것 같기도 하지만, 어쩌면 지금이 딱 맞는 타이밍인지도 모릅니다. 할 일 없이 흘러가는 오후, 혼자 앉아서 좋은 영화 한 편 보고 멍하니 있는 그 시간이 요즘 제일 행복합니다. 그게 거짓말 없이 솔직한 제 요즘 이야기입니다.

여러분도 한번 자신만의 기준을 만들어보시길 바랍니다. 처음엔 막막해도, 조금씩 보다 보면 어느 순간 기준이 생깁니다. 그게 생기고 나면 영화 보는 즐거움이 한층 달라집니다. 그 경험, 꼭 한번 해보셨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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