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의 작품이 지금도 회자되는 이유

구로사와 아키라

🎬 퇴직하고 나서야 제대로 마주친 이름, 구로사와 아키라

퇴직하고 처음 몇 달은 솔직히 좀 막막했습니다. 삼십 년 가까이 아침마다 넥타이 매고 나갔던 사람이 갑자기 갈 곳이 없어진 거니까요. 그때 저를 붙잡아 준 게 영화였습니다. 처음엔 그냥 OTT 켜서 요즘 나오는 것들 봤습니다. 마블 시리즈도 보고, 넷플릭스 드라마도 몰아봤습니다. 근데 막상 한두 달 그렇게 보다 보니까 뭔가 허전한 느낌이 드는 겁니다. 화면은 화려한데, 다 보고 나면 남는 게 없달까요. 그 허전함이 저를 결국 오래된 영화들 쪽으로 이끌었습니다.

그러다 처음 제대로 본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의 영화가 「라쇼몽」이었습니다. 솔직히 처음엔 좀 지루할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흑백이고, 오래됐고, 일본 사극이니까요. 근데 시작하고 십오 분쯤 지났을 때부터 뭔가 달랐습니다. 화면에서 눈을 못 떼겠더라고요. 다 보고 나서 멍하니 한참 앉아 있었던 기억이 납니다. 그게 제가 이 글을 쓰게 된 계기입니다. 오랜 친구들한테도 이야기하고 싶었는데, 말로만 하기엔 부족한 것 같아서요.

오늘은 구로사와 감독의 영화를 처음 보는 사람이 많이 선택하는 두 작품, 「라쇼몽」「7인의 사무라이」를 중심으로 이야기해 보려고 합니다. 두 작품 다 대단하지만, 성격이 꽤 다릅니다. 어떤 분께 어떤 작품이 더 맞을지, 제가 직접 두 편 다 보고 느낀 걸 솔직하게 이야기해 드리겠습니다.

🌧️ 라쇼몽 — 진실이란 게 과연 있기는 한 건지

「라쇼몽」은 짧습니다. 러닝타임이 한 시간 반이 조금 안 되니까요. 근데 그 짧은 시간 안에 담긴 게 어마어마합니다. 숲속에서 한 남자가 죽었습니다. 그 죽음을 둘러싼 이야기를 네 사람이 각자 다르게 증언합니다. 살인자도, 피해자도, 목격자도, 다 다른 말을 합니다. 죽은 사람이 무당의 입을 빌려 직접 나와서 하는 말도 다릅니다. 누가 진실을 말하고 있는지, 끝까지 안 알려줍니다.

처음엔 저도 좀 답답했습니다. ‘그래서 진짜 범인이 누구야?’ 하고 계속 기다렸는데 끝내 안 가르쳐 주니까요. 근데 곰곰이 생각해 보니까, 그게 바로 이 영화가 하고 싶었던 말이더라고요. 인간은 누구나 자기한테 유리한 방향으로 사실을 왜곡한다는 것. 기억이라는 것 자체가 이미 주관적이라는 것. 직장 다닐 때 회의실에서 같은 사건을 두고 부장이 하는 말과 대리가 하는 말이 완전히 달랐던 기억이 갑자기 떠올랐습니다. 그 때는 그냥 웃고 넘겼는데, 이 영화 보고 나서는 그게 얼마나 인간적인 본능이었는지 새삼 느꼈습니다.

구로사와 감독은 이 작품에서 빛을 정말 독특하게 씁니다. 숲속 장면에서 나뭇잎 사이로 쏟아지는 햇빛, 카메라가 태양을 정면으로 향하는 장면. 제 기억이 맞다면, 당시 촬영감독이 태양을 직접 찍자고 했을 때 제작진이 다 말렸다고 하더군요. 필름이 타버릴 수도 있다고요. 근데 구로사와는 그냥 밀어붙였고, 그게 지금 우리가 보는 그 몽환적인 화면이 됐습니다. 그 뚝심이 대단하다고 생각했습니다.

💭 라쇼몽의 아쉬운 점도 솔직히 말하면

솔직히 말씀드리면, 처음 보는 분들한테는 조금 불친절한 영화입니다. 이야기 구조가 낯설고, 답을 안 줘서 불편함을 느끼는 분도 있습니다. 저도 처음엔 “이게 명작이라고?” 싶었거든요. 다 보고 나서 한 이십 분쯤 지나서야 서서히 이 영화가 무서운 영화라는 걸 깨달았습니다. 보는 동안보다 보고 난 뒤에 더 무거워지는 영화입니다. 그게 익숙하지 않은 분들께는 오히려 허무하게 느껴질 수도 있습니다.

⚔️ 7인의 사무라이 — 그 긴 영화를 끝까지 보게 만드는 힘

「7인의 사무라이」는 완전히 다른 종류의 영화입니다. 일단 깁니다. 무려 세 시간 반 가까이 됩니다. 처음에 이 러닝타임 보고 솔직히 좀 망설였습니다. ‘이걸 한 번에 볼 수 있을까?’ 하고요. 근데 막상 틀어놓고 보니까, 중간에 끊기가 싫어지더라고요. 이게 이 영화의 진짜 무서운 점입니다.

이야기는 단순합니다. 도적 떼에 시달리는 가난한 마을이 사무라이를 고용해서 마을을 지킨다는 내용입니다. 근데 구로사와 감독은 이 단순한 이야기 속에 인간군상을 전부 집어넣습니다. 용맹한 사람, 겁쟁이, 계산적인 사람, 순수한 사람, 위선자. 일곱 명의 사무라이 각각이 전부 입체적인 인물입니다. 농민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처음엔 불쌍해 보이던 농민들이 나중엔 배신도 하고, 숨겨둔 걸 들키기도 합니다. 착하기만 한 사람도, 나쁘기만 한 사람도 없습니다. 그게 너무 현실적이었습니다.

저는 이 영화를 보면서 직장 생활이 계속 떠올랐습니다. 프로젝트 팀 꾸려서 큰일 해내는 과정이 딱 이 영화랑 비슷했거든요. 처음엔 의기투합했다가, 중간에 흔들리는 사람 나오고, 마지막엔 결국 살아남는 사람 따로 있고. 정확하진 않지만, 이 영화가 나온 이후로 할리우드 액션 영화의 구조 자체가 바뀌었다는 말을 어디선가 읽은 적이 있습니다. 실제로 이 영화를 보고 나면, 우리가 흔히 아는 수많은 영화들이 이 작품에서 뭔가를 가져갔다는 게 느껴집니다.

🤔 7인의 사무라이, 아쉬운 부분도 있습니다

클라이맥스 전투 장면은 지금 봐도 정말 대단합니다. 빗속의 그 마지막 전투는, 제가 지금껏 본 영화 중에 가장 긴장감 있는 장면 중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근데 전반부가 좀 깁니다. 사무라이 모집하는 과정이 꽤 길게 이어지거든요. 이 부분에서 지루함을 느끼고 꺼버리는 분들도 있다고 들었습니다. 실제로 제 친구 한 명이 딱 그랬습니다. 중반부까지 보다가 “이거 언제 시작해?” 하고 꺼버렸다고 하더라고요. 나중에 제가 끝까지 봐야 진가가 나온다고 다시 권유했습니다만.

🔍 두 편을 직접 보고 나서 느낀 진짜 차이

두 영화 다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의 작품이지만, 보고 난 다음 감각이 완전히 다릅니다. 「라쇼몽」은 뭔가 안으로 파고드는 느낌입니다. 보고 나서 혼자 조용히 생각에 잠기게 됩니다. 나는 지금까지 얼마나 솔직하게 살아왔나, 내가 기억하는 과거는 정말 사실인가, 이런 질문들이 머릿속에 맴돌게 됩니다. 반면에 「7인의 사무라이」는 다 보고 나서 뭔가 시원하면서도 씁쓸한 감정이 섞입니다. 대단한 걸 해냈는데, 그게 결국 남는 게 없더라는 느낌. 그 허무함이 오히려 오래 기억에 남습니다.

구로사와 감독이 지금도 회자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 사람의 영화는 시대를 배경으로 하지만, 하고 싶은 말은 시대를 초월합니다. 인간이 가진 이기심, 용기, 비겁함, 연대. 이런 것들은 몇백 년이 지나도 변하지 않으니까요. 제가 삼십 년 직장 생활하면서 겪은 것들이 이 오래된 흑백 영화 안에 고스란히 들어있더라고요. 그게 진짜 신기했습니다.

👤 어떤 분께 라쇼몽이 맞고, 어떤 분께 7인의 사무라이가 맞을까

제 생각엔, 「라쇼몽」은 이런 분들께 권하고 싶습니다. 최근에 누군가와 오해가 생겼거나, 오랫동안 품어온 기억이 과연 진짜인지 의심해 본 적 있는 분. 혼자 조용히 앉아서 한 시간 반 동안 뭔가 생각할 거리를 원하는 분. 긴 영화가 부담스럽거나, 짧지만 깊은 여운을 원하는 분께 딱 맞습니다.

반면에 「7인의 사무라이」는 이런 분들께 권합니다. 팀으로 무언가를 해본 경험이 있는 분. 번아웃이 왔거나, 퇴직 후 무기력함을 느끼는 분. 긴 호흡으로 이야기에 푹 빠져들고 싶은 분. 저처럼 직장 생활 오래 하고 나서 뭔가를 회고하고 싶은 분들한테는 특히 더 와닿는 작품이라고 생각합니다. 시간이 좀 걸리더라도, 그만한 가치가 있습니다.

✍️ 마무리하며 — 오래된 영화가 낡지 않는 이유

저는 요즘 영화를 보면서 한 가지 기준이 생겼습니다. 다 보고 나서 뭔가가 남는 영화인가, 아닌가.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의 작품들은 항상 뭔가가 남습니다. 며칠이 지나도 장면이 머릿속에 맴돌고, 문득 그 영화의 대사나 표정이 떠오릅니다. 그게 명작의 기준이 아닐까 싶습니다.

흑백이라서 낡아 보인다고, 오래됐다고 피하시는 분들께 꼭 드리고 싶은 말이 있습니다. 오히려 그 흑백 화면이 상상력을 더 자극합니다. 색깔이 없으니까 감정에만 집중하게 됩니다. 사실 저도 처음엔 그 편견이 있었거든요. 근데 막상 보고 나니 완전히 달랐습니다. 여러분도 한번 속아본다 치고 틀어보시길 권합니다. 후회하지 않으실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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