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퇴직하고 나서야 제대로 본 영화, 올드보이
솔직히 말하면, 이 글을 쓰게 된 건 좀 부끄러운 계기 때문입니다. 얼마 전 조카 녀석이 친구들이랑 영화 이야기를 하다가 저한테 물어보더군요. “삼촌, 올드보이 봤어요?” 저는 당연히 봤다고 했습니다. 근데 막상 “어떤 장면이 제일 인상 깊었어요?” 하고 물어보는데, 머릿속이 갑자기 하얗게 되는 겁니다. 봤다고는 했는데, 솔직히 제대로 본 게 아니었던 거죠. 직장 다닐 때 뭔가 유명하다길래 피곤한 몸으로 누워서 절반쯤 졸다가 본 기억만 어렴풋이 났습니다. 조카 앞에서 얼버무리고 방으로 들어와서 그날 밤 바로 다시 찾아봤습니다. 그게 이 글의 시작입니다.
30년 넘게 직장 다니면서 영화는 늘 “언젠가 제대로 봐야지” 하는 목록에만 쌓였습니다. 퇴직하고 나서야 비로소 그 목록들을 하나씩 꺼내보고 있는데, 올드보이는 그중에서도 저를 제일 세게 흔들어놓은 작품이었습니다.
🪑 다시 제대로 앉아서 봤더니, 전혀 다른 영화였습니다
그날 밤 거실 소파에 바르게 앉아서 처음부터 끝까지 집중해서 봤습니다. 아내는 일찍 자러 들어갔고, 저 혼자 어두운 거실에서 봤는데, 그게 결과적으로는 딱 맞는 관람 환경이었던 것 같습니다. 이 영화는 밝은 데서 편하게 보는 영화가 아니더군요.
처음엔 좀 느리다 싶었습니다. “이게 그렇게 대단하다는 영화야?” 하는 생각도 잠깐 들었습니다. 근데 오대수라는 인물이 15년이라는 시간을 혼자 방 안에서 보내는 장면들을 보다 보니, 어느 순간부터 가슴이 이상하게 답답해지기 시작했습니다. 제가 직장 생활 내내 느꼈던 그 폐쇄감이랑 어딘가 닮아 있었기 때문입니다. 사무실이라는 공간에 갇혀 하루하루를 견뎌온 느낌, 뭔가를 잃어버렸는데 뭘 잃었는지도 모르는 그 느낌 말입니다. 제 기억이 맞다면, 그 장면에서 처음으로 눈을 손등으로 훔쳤습니다.
복도 격투 장면은 말이 필요 없습니다. 길고 지저분하고 현실적입니다. 화려한 무술이 아니라 그냥 지쳐가면서도 버티는 싸움. 오히려 그게 더 무섭고, 더 처절하게 느껴졌습니다. 젊은 시절에 봤다면 그냥 “액션 멋있다” 하고 넘겼을 것 같습니다. 58살에 보니 그 몸 하나로 버텨내는 게 다르게 읽혔습니다.
👍 이 영화가 지금까지도 이정표로 불리는 이유, 제 눈으로 봤습니다
박찬욱 감독이 이 영화로 뭘 하고 싶었는지, 처음엔 잘 몰랐습니다. 그냥 복수 영화인 줄 알았으니까요. 근데 보면 볼수록, 이건 복수에 관한 영화가 아니라 기억과 죄, 그리고 인간이 얼마나 잔인해질 수 있는가에 관한 영화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우진이라는 인물이 그렇게 오랜 시간을 기다릴 수 있었다는 것, 그 집요함 자체가 공포입니다. 단순한 악당이 아닙니다. 자기 나름의 논리가 있고, 상처가 있고, 그래서 더 무서운 겁니다. 직장 다닐 때 가끔 그런 사람 봤습니다. 오랜 시간 조용히 참고 있다가 어느 날 폭발하는 사람. 이우진은 그 극단적인 버전이었습니다.
최민식 배우의 연기는 따로 말을 아끼고 싶습니다. 그냥, 그 사람이 오대수였습니다. 연기를 한다는 느낌이 전혀 안 났습니다. 특히 마지막에 진실을 알고 난 뒤 얼굴 표정은, 정확하진 않지만 제가 영화에서 본 표정 중 가장 무너지는 얼굴이었습니다.
이 영화가 한국 영화의 이정표인 건 단순히 유명해서가 아닙니다. 이 영화 이후로 한국 영화가 해외에서 ‘진지하게 다뤄지기 시작했다’는 것, 그 변화의 중심에 이 작품이 있었다는 것을 이제야 실감합니다. 많은 영화들이 이 영화의 구조를, 이 영화의 감각을 참고했다는 게 체감됩니다. 모방은 아니어도, 영향은 분명히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 솔직히 아쉬웠던 점도 있습니다
좋은 것만 말하면 거짓말이 되니까, 불편했던 것도 솔직히 써야겠습니다.
- 근친이라는 소재의 충격이 너무 전면에 나옵니다. 물론 이게 이야기의 핵심 장치인 건 알겠습니다. 그런데 보고 나서 며칠간 찝찝함이 남았습니다. 충격을 주기 위한 도구로 쓰인 건 아닌지, 그 경계선에서 계속 마음이 걸렸습니다. 감독의 의도가 예술적이라는 건 머리로는 이해하는데, 가슴으로 완전히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 중반부의 전개가 군데군데 느슨합니다. 오대수가 단서를 추적하는 과정이 조금 허술하게 느껴지는 부분들이 있었습니다. 물론 이게 현실적인 이야기가 아니라는 걸 알지만, 몇몇 장면에서는 “어, 이게 이렇게 쉽게 풀려?” 싶은 순간이 있었습니다.
- 강도 높은 폭력과 잔인한 이미지들이 많습니다. 저도 어지간한 건 괜찮은데, 이 영화는 그냥 지나치기 어려운 장면들이 꽤 됩니다. 예민한 분들이라면 보기 전에 이 점을 꼭 알고 보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아쉽다고 해서 이 영화의 가치가 줄어드는 건 아닙니다. 다만 있는 그대로 보는 게 맞다고 생각합니다. 무조건 “명작이니까 완벽하다”고 하는 건 오히려 영화에도 예의가 아닌 것 같습니다.
❓ 자주 받는 질문들, 제 생각으로 답해봤습니다
Q. 올드보이, 미리 정보 알고 보는 게 나을까요, 모르고 보는 게 나을까요?
무조건 모르고 보십시오. 이 영화는 결말을 알면 절반의 경험밖에 못 합니다. 저처럼 어디서 결말을 어렴풋이 들은 상태로 봐도 충격이 있었는데, 완전히 모르고 봤다면 얼마나 더 강렬했을까 싶어서 좀 아쉬웠습니다. 주변에 이 영화 아직 안 본 사람 있다면, 부탁드리는데 제발 결말 얘기는 꺼내지 마십시오.
Q. 나이 드신 분들이 보기에는 어떨까요? 젊은 사람 취향 영화 아닌가요?
오히려 반대입니다. 제가 50대에 보고 훨씬 더 많이 느꼈습니다. 젊을 때는 표면적인 것들, 액션이나 반전에 집중하겠지만, 살아온 시간이 좀 있는 사람은 그 아래 깔린 것들이 더 잘 보입니다. 후회, 선택, 기억, 죄의식. 이런 것들은 나이를 먹을수록 더 무겁게 읽히는 주제입니다.
Q. 박찬욱 감독 영화를 처음 보는 사람한테도 이 영화가 첫 번째로 적합할까요?
솔직히 조금 고민됩니다. 강렬하기 때문에 처음이라면 조금 당황할 수도 있습니다. 그래도 박찬욱이라는 감독이 어떤 사람인지 가장 뚜렷하게 보여주는 작품인 건 맞습니다. 입문용이기도 하고, 입문하기엔 조금 거친 작품이기도 합니다. 뭔가를 강하게 받아들일 준비가 된 날, 보시는 걸 권합니다.
🌙 마무리하며, 이 영화를 추천하고 싶은 사람
제 또래 분들 중에 “그 영화 유명하다던데 나는 별로일 것 같아”라고 미뤄두신 분들이 계시다면, 꼭 한 번만 제대로 앉아서 보시길 권합니다. 저처럼 피곤할 때 대충 본 게 전부라면, 다시 보십시오. 전혀 다른 영화입니다.
이 영화가 지금도 한국 영화의 이정표로 불리는 건, 화려해서가 아닙니다. 불편하고, 무겁고, 보고 나서도 며칠이 지나도록 머릿속을 떠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좋은 영화의 기준이 뭔지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보고 나서 오래 남는 영화라면, 올드보이는 분명히 그 자격이 있습니다.
퇴직하고 나서 얻은 게 있다면, 바로 이런 시간입니다. 영화 한 편 제대로 볼 수 있는 조용한 밤. 그 시간에 이 영화를 만난 건, 꽤 잘한 일이었다고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