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처음 보는 프랑스 영화,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까
퇴직하고 나서 제일 먼저 한 게 뭔지 아십니까. 밀려있던 영화 목록 정리였습니다. 30년 동안 직장 다니면서 “나중에 봐야지” 했던 것들이 수첩 두 장을 꽉 채우고 있었습니다. 근데 막상 하나씩 보기 시작하니까, 헐리우드 영화만 보던 제가 어느 순간 벽에 부딪혔습니다. 자극이 없는 겁니다. 폭발도 없고, 추격전도 없는데 뭔가 더 보고 싶은 느낌. 그게 뭔지 몰라서 한동안 답답했습니다.
그러다가 우연히 TV 채널 돌리다가 자막이 낯선 영화 하나를 봤습니다. 제 기억이 맞다면 공중파가 아니라 케이블 예술 채널이었을 겁니다. 배우들이 카페에 앉아서 철학 이야기를 한 시간 가까이 하는데, 졸릴 것 같았는데 오히려 못 껐습니다. 나중에 찾아보니 프랑스 영화였습니다. 그때부터 시작된 겁니다.
근데 막상 프랑스 영화를 보려고 찾아보면 선택지가 너무 많습니다. 크게 나눠보면 두 갈래더군요. 누벨바그라고 불리는 고전 계열과, 요즘 나오는 현대 프랑스 영화. 사실 저도 처음엔 이 둘이 뭐가 다른지 전혀 몰랐습니다. 다 프랑스 영화 아닌가, 했습니다. 근데 실제로 보고 나니 느낌이 완전히 달랐습니다. 오늘은 그 이야기를 해볼까 합니다.
🖤 누벨바그, 오래됐지만 여전히 살아있는 것들
누벨바그라는 말, 들어보신 분도 있을 겁니다. 직역하면 ‘새로운 물결’이라는 뜻인데, 프랑스에서 기존 영화 방식을 완전히 뒤집은 감독들이 나타났을 때 붙여진 이름입니다. 장뤼크 고다르, 프랑수아 트뤼포 같은 이름들이 여기 속합니다.
제가 처음 본 누벨바그 영화는 트뤼포의 작품이었습니다. 소년이 가출하고 방황하는 이야기인데, 처음 30분은 솔직히 어리둥절했습니다. 카메라가 왔다 갔다 하고, 장면이 설명 없이 툭툭 끊기고. 직장 생활 오래 한 사람이라 그런지 처음엔 “이게 뭐가 좋다는 거야” 했습니다. 근데 끝 장면에서 가슴이 먹먹해졌습니다. 뭔가 설명할 수 없는 감정이었습니다.
누벨바그 영화들의 특징을 굳이 말하자면 이렇습니다.
- 이야기가 결론을 향해 달려가지 않습니다. 그냥 삶처럼 흘러갑니다.
- 대사가 많습니다. 그것도 일상적인 대화인데 그 안에 뭔가 들어있습니다.
- 영상이 거칩니다. 정확하진 않지만, 당시 기술 한계도 있었던 것 같고, 그게 오히려 날것의 느낌을 줍니다.
- 주인공이 딱히 영웅이 아닙니다. 그냥 평범하거나 오히려 찌질한 사람들입니다.
저처럼 퇴직하고 나서 ‘내 인생이 뭐였나’ 하는 생각이 드는 분들에게는, 이 영화들이 묘하게 위로가 됩니다. 거창한 결말 없이도 살아가는 사람들을 보여주니까요. 아, 그리고 고다르 영화는 처음엔 좀 어렵습니다. 저도 세 번 껐다 켰습니다. 처음 도전하시는 분한테 고다르부터 들이밀면 프랑스 영화 영영 안 보게 될 수도 있습니다. 이건 제 실패담에서 나온 경고입니다.
🌟 현대 프랑스 영화, 생각보다 가깝습니다
반면에 요즘 나오는 프랑스 영화들은 다릅니다. 훨씬 보기 편합니다. 장르도 다양하고, 이야기 구조도 우리가 익숙한 방식에 가깝습니다. 코미디도 있고, 스릴러도 있고, 멜로도 있습니다.
제가 현대 프랑스 영화 중에서 처음으로 제대로 빠진 건 오드리 토투가 나오는 작품이었습니다. 파리를 배경으로 한 판타지 성격의 멜로물인데, 영상이 너무 예뻐서 멍하니 봤습니다. 색감이 다른 영화들이랑 달랐습니다. 그 따뜻한 노란색 톤이 아직도 눈에 남아있습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촬영감독이 색 보정에 굉장히 공을 들인 작품이더군요.
현대 프랑스 영화들이 가진 특징은 대략 이렇습니다.
- 스토리가 있습니다. 시작, 중간, 끝이 비교적 명확합니다.
- 감각적입니다. 음악, 색감, 패션, 공간 모두 세련됐습니다.
- 유머가 있습니다. 프랑스식 위트가 있는데, 처음엔 좀 어색해도 익숙해지면 재밌습니다.
- 사회 문제를 다루는 작품들도 있습니다. 이민자, 계층, 가족 해체 같은 주제인데 무겁지 않게 풀어냅니다.
다만 아쉬운 점도 있습니다. 현대 프랑스 영화 중 일부는 너무 세련된 척 하는 게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30년 회사 생활에서 배운 게 있다면, 폼만 잡는 것과 실제로 내용이 있는 것은 금방 티가 난다는 겁니다. 예쁘고 감각적인데 보고 나면 아무것도 남지 않는 영화들이 간혹 있습니다. 그런 영화를 두세 번 겪고 나면 살짝 지치기도 합니다.
🤔 직접 두 갈래를 넘나들며 느낀 차이
한 달 넘게 두 종류를 번갈아 보면서 가장 크게 느낀 차이는 ‘여운의 종류’였습니다. 누벨바그는 보고 나서 멍하게 앉아있게 됩니다. 뭔가 말로 설명 못 할 감정이 오래 남습니다. 혼자서 되새기게 됩니다. 반면에 현대 프랑스 영화는 보는 동안 즐겁고, 보고 나서 누군가한테 말하고 싶어집니다. 여운의 깊이보단 감정의 속도가 빠릅니다.
어느 쪽이 낫다는 게 아닙니다. 그날 제 기분에 따라 필요한 게 달랐습니다. 마음이 복잡한 날엔 누벨바그가 위로가 됐고, 그냥 기분 좋게 보고 싶은 날엔 현대 프랑스 영화가 맞았습니다. 이 두 개를 나눠서 생각하게 된 것 자체가 제가 조금 성장한 거라고 생각합니다.
💡 어떤 분께 어느 쪽이 맞을까요
제 경험을 기준으로 솔직하게 말씀드리겠습니다.
누벨바그가 맞는 분은, 조용한 시간을 오래 갖고 싶은 분들입니다. 퇴직 후처럼 혼자 있는 시간이 많아졌고, 지나온 삶을 한 번쯤 돌아보고 싶은 분들. 빠른 전개나 자극보다 느리게 스며드는 감정을 원하는 분들에게 잘 맞습니다. 단, 처음엔 좀 불편할 수 있다는 걸 각오하셔야 합니다. 그 불편함을 버티면 나중엔 다른 세계가 보입니다.
현대 프랑스 영화가 맞는 분은, 아직 유럽 영화가 낯선 분들입니다. 헐리우드 영화에 질렸는데 너무 난해한 건 싫다, 하는 분들. 아니면 그냥 파리라는 도시가 궁금한 분들. 영화로 여행하는 기분 내고 싶은 분들에게 현대 프랑스 영화는 굉장히 친절한 입구가 됩니다.
🎞️ 마무리하며
프랑스 영화 보기 전에 저는 영화가 그냥 오락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퇴직하고 시간이 남으니까 때우는 거라고. 근데 지금은 좀 다르게 생각합니다. 좋은 영화 한 편이 오랜 친구랑 나눈 긴 대화 같다는 걸 알게 됐습니다. 프랑스 영화는 특히 그 대화가 깊습니다. 처음엔 낯설어도, 한 발만 들여놓으면 빠져나오기 어렵습니다. 저처럼요. 어디서부터 시작할지 막막하신 분들, 일단 현대 프랑스 영화 한 편부터 가볍게 보시고, 그 다음에 누벨바그로 넘어와 보십시오. 순서가 맞는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