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퇴직하고 나서야 제대로 만난 구로사와 아키라
30년을 직장 다니면서 영화는 그냥 피로 풀려고 보는 거였습니다. 퇴근하고 소파에 누워서 넷플릭스 켜면 대충 눈에 띄는 거 틀어놓고, 절반은 졸면서 보는 식이었죠. 그러다 퇴직하고 처음 몇 달은 뭘 해야 할지 몰라서 하루 종일 TV 앞에 앉아 있었습니다. 아내는 밖에 나가서 좀 움직이라고 하는데, 제 다리가 말을 잘 안 듣더라고요. 무릎이 좀 안 좋아서.
그때 고등학교 동창 민철이 녀석이 전화를 했습니다. 걔는 예전부터 영화를 꽤 진지하게 보는 친구였는데, 이제 시간도 많으니까 구로사와 아키라 한번 제대로 파보라고 하더군요. 솔직히 이름은 들어봤습니다. 구로사와 아키라. 뭔가 있어 보이는 이름이잖아요. 근데 막상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전혀 몰랐습니다. 그냥 검색하면 작품 목록이 주르륵 나오는데, 뭘 먼저 봐야 한다는 건지 순서가 없으니까 막막했어요.
이 글을 쓰게 된 건 바로 그 막막함 때문입니다. 저처럼 구로사와라는 이름은 알지만 어디서 시작해야 할지 모르는 분들, 특히 저처럼 나이가 좀 있어서 옛날 영화에 선뜻 손이 안 가는 분들한테 제 경험이 조금이라도 도움이 됐으면 합니다.
🎥 제가 실제로 본 순서, 그리고 솔직한 반응
첫 번째 — 《요짐보》로 시작한 게 신의 한 수였습니다
민철이가 처음에 《라쇼몬》부터 보라고 했습니다. 근데 솔직히 저는 거기서 막혔습니다. 첫 장면부터 비가 쏟아지고 분위기가 너무 묵직하고… 20분쯤 보다가 껐어요. 나중에 다시 봤을 때는 엄청난 작품이라는 걸 알았는데, 처음 보는 사람한테는 살짝 벽이 높습니다. 제 기억이 맞다면 그날 결국 저는 유튜브에서 강아지 영상 보다가 잠들었습니다.
그다음 날 다시 마음 잡고 찾아보다가 《요짐보》를 틀었습니다. 이건 달랐어요. 거의 처음부터 끝까지 눈을 못 뗐습니다. 미후네 토시로가 연기하는 주인공이 어느 마을에 혼자 들어가서 두 세력을 서로 싸우게 만들고 자기는 이익을 챙기는 구조인데, 이게 완전히 서부극 같은 느낌입니다. 실제로 이 영화가 나중에 서양 서부영화에 엄청난 영향을 줬다는 건 나중에 알았지만요. 어쨌든 처음 입문하는 분들께는 《요짐보》를 가장 먼저 권해드립니다. 흑백이라는 게 처음엔 좀 거슬릴 수 있는데, 10분만 지나면 그냥 익숙해집니다.
두 번째 — 《7인의 사무라이》, 이건 진짜 압도적입니다
《요짐보》를 보고 며칠 뒤에 이걸 봤습니다. 러닝타임이 꽤 깁니다. 처음엔 중간에 좀 지루할 수도 있겠다 싶었는데, 보다 보면 각각의 인물들이 하나하나 살아 움직이는 느낌이 들어요. 특히 저처럼 오랫동안 조직 생활 한 사람한테는 뭔가 다르게 다가옵니다. 제각각 성격 다른 사람들이 하나의 목표를 위해 뭉치는 이야기잖아요. 팀장 시절 생각도 나고, 말 안 통하던 후배 직원 얼굴도 떠오르고.
정확하진 않지만, 이 영화가 세계 영화사에서 손꼽히는 걸작 목록에 거의 항상 올라간다고 합니다. 보고 나면 그 이유를 납득하게 됩니다. 무조건 봐야 합니다.
세 번째 — 《이키루》, 이건 좀 달랐습니다
이 영화는… 사무라이도 안 나오고, 액션도 거의 없습니다. 시한부 판정을 받은 공무원이 자기 삶의 의미를 찾아가는 이야기입니다. 근데 저는 이 영화를 보다가 중간에 한 번 멈추고 차를 한 잔 탔습니다. 갑자기 먹먹해져서요. 30년 직장생활 하면서 나는 뭘 남겼나, 그런 생각이 갑자기 확 밀려왔거든요. 구로사와 영화 중에 개인적으로 가장 마음에 남는 작품을 꼽으라면 저는 이걸 고릅니다. 화려하지 않아서 오히려 더 무서운 영화입니다.
네 번째 — 《라쇼몬》, 처음에 실패했지만 두 번째엔 달랐습니다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처음엔 20분 만에 껐습니다. 근데 《7인의 사무라이》와 《이키루》를 보고 나서 다시 도전하니까 완전히 다르게 보이더라고요. 같은 사건을 서로 다른 입장에서 전혀 다르게 증언하는 구조인데, 이게 단순히 “진실이 뭐냐”의 문제가 아니라 “사람은 자기한테 유리하게 기억을 왜곡한다”는 이야기입니다. 회사 다닐 때 회의에서 서로 자기 입장만 주장하던 동료들 생각이 났습니다. 인간이 원래 그런 거라는 걸 이미 그 시절에 영화로 만들었다는 게 놀라웠습니다.
👍 좋았던 점 — 생각보다 훨씬 ‘재미있는’ 감독입니다
솔직히 구로사와 아키라 하면 왠지 어렵고 졸릴 것 같은 이미지가 있었습니다. 고전 명작, 흑백 영화, 일본 영화라는 조합이 그런 선입견을 만들었던 것 같아요. 근데 막상 보니까 이 감독은 기본적으로 이야기를 재미있게 만드는 사람입니다. 카메라 움직임이 살아 있고, 캐릭터들이 뚜렷하고, 이야기 구조도 군더더기가 없습니다. 퇴직하고 멍하니 지내던 제 하루에 활기를 불어넣어 준 것은 분명합니다.
또 하나, 이 영화들을 보고 나면 이후에 보는 다른 영화들이 달라 보입니다. “어, 이거 구로사와 영향을 받은 거 아닌가?” 싶은 장면들이 갑자기 눈에 들어오기 시작하거든요. 마치 오래된 책 한 권을 읽고 나서 다른 책들이 그 책에서 얼마나 많이 빌려왔는지 보이는 것처럼요.
😅 아쉬웠던 점 — 솔직히 다 쉽진 않습니다
입문 순서를 나름대로 잘 짰다고 생각했는데도, 중간중간 집중력이 확 떨어지는 구간이 있습니다. 특히 대사가 많고 장면 전환이 느린 부분들은 솔직히 좀 힘들었습니다. 나이가 드니까 집중력이 예전 같지 않은 것도 있고요. 한 편을 한 번에 다 보려고 욕심 부리지 말고 중간에 잠깐 쉬어가는 게 낫습니다. 저는 처음에 그걸 몰라서 억지로 끝까지 보려다가 오히려 영화가 싫어지는 경험을 한두 번 했습니다.
그리고 자막 문제도 있습니다. 오래된 영화라서 자막 품질이 버전마다 많이 다릅니다. 어떤 건 번역이 어색해서 대사의 뉘앙스가 제대로 안 전해지는 경우가 있어요. 가능하면 여러 버전을 비교해 보시는 걸 추천드립니다. 사실 저도 처음엔 자막이 이상하다는 걸 몰랐고, 나중에 다른 자막 버전으로 보고 나서야 “아, 그 장면이 그런 의미였구나” 한 적이 있습니다.
❓ 자주 묻는 질문들
Q. 흑백 영화라 거부감이 드는데 그래도 봐야 하나요?
저도 처음엔 그랬습니다. 근데 솔직히 말씀드리면, 보다 보면 흑백이 오히려 더 강렬하게 느껴지는 순간이 옵니다. 비 오는 장면이나 칼싸움 장면 같은 경우는 흑백이기 때문에 더 극적으로 보이는 것들이 있어요. 처음 15분만 버티면 됩니다. 진짜로요.
Q. 꼭 순서대로 봐야 하나요?
아닙니다. 순서가 정해져 있는 건 아닙니다. 다만 《요짐보》처럼 상대적으로 진입장벽이 낮은 작품부터 시작하면 포기할 가능성이 줄어든다는 게 제 경험입니다. 《라쇼몬》을 처음으로 봤다가 중간에 포기하고 아예 구로사와를 안 보게 되는 것보다는, 순서를 조금 고려하는 게 낫습니다.
Q. 구로사와 영화가 총 몇 편인데 다 봐야 하나요?
제 기억이 맞다면 30편 가까이 됩니다. 다 볼 필요는 전혀 없습니다. 제가 소개한 네 편만 봐도 충분히 이 감독이 왜 대단한지 느낄 수 있습니다. 그 이후는 자연스럽게 더 보고 싶어지는 본인이 결정하는 겁니다.
✍️ 마무리하며
퇴직하고 처음 몇 달은 좀 허했습니다. 30년을 그 자리에 있었는데 갑자기 없어지니까 뭘 해야 할지 몰랐어요. 구로사와 아키라 영화들이 그 빈자리를 채워준 건 아닙니다. 근데 적어도 매일 뭔가를 기다리는 이유가 생겼습니다. 오늘은 어느 장면에서 멈추게 될까, 오늘은 어떤 생각이 떠오를까. 그게 작은 것 같아도 하루를 살아가는 데 꽤 큰 힘이 됩니다.
구로사와 아키라의 영화들은 그냥 오래된 고전이 아닙니다. 지금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도 충분히 공명하는 이야기들입니다. 처음 보시는 분이라면 겁먹지 말고 《요짐보》 한 편만 먼저 틀어보시길 권합니다. 거기서부터 시작하면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