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퇴직하고 나서야 제대로 본 영화들
30년 직장생활을 마치고 나니까 이상하게 시간이 많아졌습니다. 당연한 얘기지만, 막상 그 시간 앞에 서면 뭘 해야 할지 몰라서 멍하니 소파에 앉아 있는 날이 꽤 있었습니다. 아내는 낮에 파트타임으로 나가고, 애들은 다 컸으니 집 안은 조용하고. 그렇게 시작한 게 영화였습니다. 젊었을 때 “언젠가 봐야지” 하고 미뤄뒀던 것들을요.
그러다 어느 날 OTT 추천 알고리즘이 올드보이를 띄워줬습니다. 제 기억이 맞다면 개봉할 때 동료들이 “무조건 봐야 한다”고 했는데, 그땐 야근에 치여서 그냥 지나쳤던 영화입니다. 그걸 클릭했다가 그 밤에 잠을 못 잤습니다. 충격이 아니라, 생각이 너무 많아져서요. 그래서 다음 날 바로 복수는 나의 것을 찾아봤고, 그다음 주에 친절한 금자씨까지 다 봤습니다. 이 글은 그 감상을 정리해두고 싶어서 쓰게 됐습니다. 거창한 평론은 아닙니다. 그냥 58세 아저씨가 뒤늦게 보고 느낀 이야기입니다.
📽️ 박찬욱 복수 3부작, 일단 이게 뭔지부터
혹시 이 세 편이 같은 세계관의 이야기라고 생각하는 분들이 계실 수 있어서 먼저 말씀드립니다. 정확하진 않지만, 제가 찾아본 바로는 이 세 영화는 각각 독립된 이야기입니다. 등장인물이 이어지거나 세계관이 연결되는 건 아니고, ‘복수’라는 주제를 세 가지 방식으로 다룬 작품들을 묶어서 부르는 거라고 알고 있습니다. 저는 이걸 모르고 처음엔 올드보이를 보면서 복수는 나의 것 내용을 떠올리려고 애썼는데, 당연히 연결이 안 됐습니다. 그냥 각각 독립 영화라고 생각하고 보시면 됩니다.
순서는 복수는 나의 것 → 올드보이 → 친절한 금자씨 순입니다. 저는 올드보이를 먼저 봤는데, 나중에 순서대로 다시 보니 감독이 어떤 방향으로 생각이 진화했는지 조금 보이는 것 같기도 했습니다. 물론 이건 완전히 제 느낌입니다.
🩸 복수는 나의 것 — 가장 불편했던 영화
솔직히 말하면 이 영화가 세 편 중에 제일 보기 힘들었습니다. 불편하다는 게 영화가 나쁘다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 불편함이 진짜였습니다. 청각장애인 동생을 위해 신장을 팔려다 사기를 당하고, 어쩔 수 없이 아이를 납치하는 남자. 그런데 그 남자를 미워하기가 어렵습니다. 악한 의도가 없으니까요. 그냥 사랑하는 사람을 살리고 싶었을 뿐인데 모든 게 어긋납니다.
직장생활 오래 하다 보면 선한 의도로 한 일이 완전히 다른 결과를 낳는 경험을 합니다. 저도 그런 일이 몇 번 있었습니다. 부하 직원 잘 되라고 한 말이 상처가 됐다거나, 좋게 하려다가 팀 분위기를 망쳤다거나. 그 영화의 류를 보면서 그 느낌이 났습니다. 의도와 결과가 이렇게 달라질 수 있구나 하는 서늘함.
그리고 이 영화에서 복수는 결국 아무것도 해결하지 못합니다. 복수한 사람도, 당한 사람도, 그 주변 사람도 전부 망가집니다. 끝까지 보고 나면 뭔가 허탈한데, 그게 감독이 하려는 말이었던 것 같습니다. 복수가 얼마나 공허한 짓인지를요.
🔒 올드보이 — 처음 봤을 때 한동안 멍했습니다
이 영화는 이미 유명하니까 굳이 줄거리를 설명할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 다만 제가 느낀 걸 말씀드리자면, 저는 영화 보는 내내 ‘이 남자가 왜 갇혔는지’에 집중했습니다. 그게 궁금해서 화면을 놓치기가 싫었습니다. 그런데 결말을 보고 나서는 그 질문이 사실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는 걸 알게 됐습니다. 진짜 무서운 건 이유가 아니라, 그 이유를 위해 누군가가 수십 년을 설계했다는 사실이었습니다.
50대가 되면 지나온 시간의 무게를 알게 됩니다. 15년이 얼마나 긴지, 그 세월 동안 사람이 어떻게 변하는지. 올드보이의 오대수는 그 15년을 방 안에서 보냅니다. 나왔을 때 그가 어떤 사람이 됐을지를 생각하면, 단순한 스릴러로 보기가 어렵습니다. 그래서인지 이 영화는 젊었을 때 봤으면 그냥 “충격적인 반전 영화”로 끝냈을 것 같습니다. 지금 보니까 조금 다르게 읽혔습니다.
아쉬운 점도 있었습니다. 후반부에 감정이 너무 과잉으로 치닫는 부분이 있는데, 개인적으로는 그 직전의 절제된 장면들이 훨씬 강렬했습니다. 감독이 좀 더 참았더라면 어땠을까 싶기도 했습니다. 근데 이건 완전히 취향의 문제라 뭐라 말하기가 애매하긴 합니다.
🕯️ 친절한 금자씨 — 가장 아름답고 가장 슬펐습니다
세 편 중에 제가 가장 오래 생각한 영화입니다. 화면이 예쁩니다. 색감이 특이하고, 금자씨가 입는 옷이나 그녀가 만드는 두부 같은 소품들이 다 기억에 남습니다. 근데 그게 더 슬픕니다. 이렇게 아름다운 화면 안에서 이렇게 처절한 이야기가 펼쳐지니까요.
금자씨는 복수를 준비하는 데 13년을 씁니다. 그런데 막상 복수를 이루고 나서도 그녀는 행복해 보이지 않습니다. 제가 이 부분에서 좀 멈칫했습니다. 30년 직장생활 동안 억울했던 일이 없었냐면 그건 아닙니다. 나를 밀어낸 사람, 공을 가로챈 사람, 부당하게 대한 상사. 그 사람들이 나중에 어떻게 되든 내 속이 시원했냐 하면, 솔직히 별로 그렇지 않았습니다. 금자씨를 보면서 그 기분이 생각났습니다.
이 영화가 3부작의 마지막이라는 게 맞는 것 같습니다. 복수는 나의 것이 ‘복수는 공허하다’를 보여줬고, 올드보이가 ‘복수는 파멸을 부른다’를 보여줬다면, 친절한 금자씨는 ‘복수를 이루고 난 뒤에 남는 것’을 보여줍니다. 세 편을 다 보고 나면 박찬욱 감독이 결국 하고 싶었던 말이 뭔지 조금은 보이는 것 같습니다. 복수란 결국 자기 자신을 향하는 칼이라는 것.
⚠️ 보기 전에 알아두면 좋은 것들
- 폭력 장면이 적지 않습니다. 특히 복수는 나의 것과 올드보이는 자극적인 장면이 있어서, 이런 류가 많이 불편하신 분들은 각오를 좀 하고 보시는 게 좋습니다. 저도 몇 장면은 눈을 잠깐 돌렸습니다.
- 가볍게 보기엔 어려운 영화들입니다. 피곤한 날 틀어놓고 보다 자면 되는 그런 영화가 아닙니다. 어느 정도 집중할 여유가 있을 때 보시길 권합니다.
- 세 편을 하루에 다 보려 하지 마십시오. 저는 처음에 연달아 보려고 했는데 올드보이 끝나고 머리가 너무 무거워서 금자씨는 다음 날 봤습니다. 그게 오히려 좋았습니다. 각 영화가 남긴 여운을 좀 소화하고 다음 편으로 넘어가는 게 더 깊이 즐길 수 있는 방법인 것 같습니다.
- 정보 없이 보는 게 훨씬 낫습니다. 특히 올드보이는 반전이 중요한 영화라서, 미리 검색하면 재미가 확 줄 수 있습니다. 저는 다행히 큰 내용을 모르고 봤습니다.
👥 이런 분들께 추천합니다
모든 사람에게 권하고 싶은 영화는 아닙니다. 솔직하게 말씀드리겠습니다.
- 인생에서 억울하거나 분한 일을 겪어보신 분. 그 감정이 어디로 흘러가는지를 이 영화들이 조금 다른 방식으로 보여줍니다.
- 한국 영화가 어디까지 갈 수 있는지 궁금하신 분. 연출, 미장센, 배우들의 연기 모두 수준이 다릅니다.
- 저처럼 퇴직 후 시간이 생겨서 그냥 때우는 게 아니라 뭔가 생각할 거리가 있는 영화를 찾는 분.
- 반면에 밝고 가벼운 영화를 원하시는 분, 또는 폭력 묘사에 민감하신 분들께는 권하지 않습니다.
✍️ 마치면서
세 편을 다 보고 나서 며칠 동안 이 영화들 생각이 계속 났습니다. 직장 다닐 때는 영화를 보고 나서 그다음 날이면 거의 잊어버렸는데, 이번엔 달랐습니다. 시간이 생긴 덕분인지, 아니면 나이가 들어서 다르게 보이는 건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아마 둘 다겠지요.
젊었을 때 이 영화들을 봤다면 저는 아마 “대단한 영화다” 정도로 끝냈을 것 같습니다. 지금은 그것보다 좀 더 남는 게 있었습니다. 그냥 살면서 쌓인 게 있으니까, 영화 안에서 보이는 것도 달라지는 것 같습니다. 그게 나이 드는 일의 작은 보람 중 하나가 아닐까 싶습니다.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혹시 세 편 다 보셨거나 하나만 보셨다면, 저처럼 순서대로 다시 한번 보시는 것도 나쁘지 않습니다. 처음 봤을 때와 분명히 다른 게 보일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