잔잔한 일본 영화가 직장인 마음을 회복시키는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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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퇴직하고 나서야 알게 된 것들

이 글을 쓰게 된 건 사실 별거 아닌 계기였습니다. 퇴직하고 딱 한 달쯤 지났을 때였나요. 아침에 눈을 떴는데 갈 데가 없는 거예요. 30년을 매일 아침 넥타이 매고 나가던 사람이, 그냥 멍하니 천장만 보고 있었습니다. 그날따라 아내는 친정에 갔고, 집 안이 무섭도록 조용했습니다. 뭔가를 해야 한다는 생각은 있는데, 몸이 안 움직이는 그런 날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냥 켰습니다. 뭘 볼지도 모르고 스트리밍 서비스를 켰는데, 알고리즘이 추천해준 일본 영화 하나가 눈에 들어왔습니다. 제목도 생소하고, 포스터도 뭔가 심심해 보이는 그런 영화였습니다. 근데 막상 틀어놓고 보니까, 두 시간이 어떻게 지났는지 모르겠더라고요. 끝나고 나서 한참을 멍하게 앉아 있었습니다. 울었는지 안 울었는지도 잘 모르겠습니다. 눈이 좀 뜨거웠던 것 같기도 하고요.

그때부터였습니다. 일본 영화를 하나씩 찾아보기 시작한 게.

🗂️ 직장 생활 30년, 그리고 내가 잃어버렸던 것

솔직히 말씀드리면, 저는 직장 다닐 때 영화를 거의 안 봤습니다. 볼 시간이 없기도 했지만, 더 솔직하게는 마음에 여유가 없었습니다. 퇴근하면 피곤하고, 주말엔 그냥 쉬고 싶고. 두 시간을 영화 한 편에 쓴다는 게 뭔가 사치처럼 느껴졌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참 이상한 논리인데, 그땐 그게 당연했습니다.

30년 직장생활이라는 게, 어떻게 보면 자기 감정을 잘 눌러두는 훈련이었던 것 같습니다. 화가 나도 참고, 억울해도 참고, 슬퍼도 표현 못 하고. 회의실에서, 거래처 앞에서, 부하직원 앞에서. 늘 ‘괜찮은 척’을 해야 했습니다. 그게 쌓이면 어떻게 되냐고요. 어느 날 갑자기 자기 감정을 어떻게 다뤄야 하는지 모르는 사람이 됩니다. 저처럼요.

퇴직하고 나서 처음 몇 달은 오히려 더 힘들었습니다. 바쁨이라는 마취제가 사라지니까, 눌러뒀던 것들이 올라오는 거예요. 잘 살았나, 제대로 살았나, 이런 질문들이 새벽에 불쑥불쑥 튀어나왔습니다. 누구한테 물어볼 수도 없고. 친구들도 다들 아직 현직이고, 아내한테는 걱정 끼치기 싫었습니다.

🎥 처음 본 일본 영화, 근데 처음엔 별로였습니다

처음에는 솔직히 재미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제 기억이 맞다면, 처음 본 영화가 시골 마을을 배경으로 한 조용한 이야기였는데, 30분이 지나도 아무 사건이 없는 거예요. 헐리우드 영화처럼 뭔가 터지고 쫓기고 하는 게 없으니까, ‘이게 뭔가’ 싶었습니다. 중간에 한 번 껐다가 다시 켰습니다. 그냥 잠이나 자려고 틀어놓은 배경 정도로 생각했는데.

근데 어느 순간부터 빠져들었습니다. 주인공이 밥을 짓는 장면이었는데, 쌀 씻는 소리가 들리고, 김이 모락모락 나는 화면이 나오는데. 이상하게 그게 너무 좋았습니다. 뭔가를 해결해주는 것도 아니고, 위로의 말을 해주는 것도 아닌데. 그냥 그 화면을 보는 것 자체가 마음을 건드렸습니다.

그 뒤로 여러 편을 봤습니다. 정확하진 않지만 한 달에 서너 편 정도는 본 것 같습니다. 보다 보니까 일본 영화에는 공통적인 뭔가가 있더라고요. 서두르지 않는다는 것. 빨리 감동을 주려고 억지로 사건을 만들지 않는다는 것. 그냥 사람이 살아가는 일상을 가만히 들여다본다는 것. 그게 처음엔 지루했는데, 나중엔 그게 가장 큰 장점이 됐습니다.

💛 좋았던 점들, 솔직하게 말씀드리면

가장 좋았던 건 ‘강요하지 않는다’는 느낌이었습니다. 직장 다닐 때는 늘 누군가가 뭔가를 요구했습니다. 더 열심히, 더 빠르게, 더 좋은 결과를. 근데 일본 영화는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아요. 그냥 앉아서 보고 있으면 됩니다. 눈물을 흘려도 되고, 안 흘려도 되고. 감동받아도 되고, 그냥 졸려도 됩니다. 그 자유로움이 저한테는 엄청난 휴식이었습니다.

두 번째로 좋았던 건, 나이 든 사람이 주인공으로 나온다는 것이었습니다. 헐리우드나 한국 영화들은 대부분 젊고 빛나는 사람들의 이야기잖아요. 근데 일본 영화는 60대 할아버지가 혼자 밥 먹는 이야기도 하고, 70대 할머니가 여행 떠나는 이야기도 하고. 그게 저한테는 ‘나도 아직 괜찮을 수 있다’는 느낌을 줬습니다. 거창한 위로가 아니라, 그냥 같은 나이대 사람을 화면에서 보는 것만으로도 그랬습니다.

그리고 세 번째. 이건 좀 개인적인 이야기인데, 일본 영화를 보면서 저는 처음으로 오래 한자리에 앉아 있는 연습을 했습니다. 30년 동안 항상 뭔가를 하면서, 멀티태스킹을 하면서 살았는데. 영화 한 편을 끝까지, 딴 생각 안 하고 보는 것 자체가 저한테는 일종의 훈련이었습니다. 그게 마음을 차분하게 만들어줬습니다. 명상이니 뭐니 해도 잘 안 됐는데, 영화는 되더라고요.

😅 아쉬웠던 점도 있습니다, 솔직히

좋은 말만 하면 재미없잖아요. 아쉬운 점도 있었습니다.

일단, 진입 장벽이 생각보다 있습니다. 처음 보는 분들은 분명히 지루하다고 느끼실 겁니다. 저도 그랬으니까요. 사건 전개가 워낙 느리고, 대사도 많지 않고, 감정 표현도 절제되어 있으니까. 익숙하지 않은 분들은 첫 한 시간을 버티는 게 쉽지 않을 수 있습니다. 처음부터 너무 잔잔한 걸 고르면 포기할 수도 있어요. 이 부분은 진짜 조심해야 합니다.

또 하나는, 어떤 날엔 오히려 역효과가 날 수도 있다는 거예요. 제가 유독 기분이 가라앉아 있던 날, 너무 조용한 영화를 봤다가 더 우울해진 적이 있었습니다. 영화 자체는 나쁘지 않았는데, 제 상태가 그날따라 안 좋았던 거죠. 잔잔한 영화는 마음이 완전히 바닥일 때보다는, 좀 지쳐 있지만 그래도 괜찮은 상태일 때 보는 게 더 맞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자막 이야기를 안 할 수 없는데, 눈이 좀 나쁜 분들은 자막 읽는 게 피곤할 수 있습니다. 저도 돋보기 없이 보다가 눈이 아팠습니다. 이건 진짜 별거 아닌 것 같아도, 60대 가까운 분들한테는 무시 못 할 불편함입니다.

❓ 자주 받는 질문들

Q. 일본 영화, 어떤 걸 먼저 봐야 할까요?

이게 제일 많이 받는 질문입니다. 솔직히 정답은 없는데, 저는 너무 무겁지 않고 일상을 담은 영화부터 시작하시라고 말씀드립니다. 음식이 나오거나, 계절 변화가 담긴 영화들이 처음 보는 분들한테는 잘 맞더라고요. 처음부터 너무 깊은 감정을 다루는 작품을 고르면 부담스러울 수 있습니다. 일단 가볍게, 예쁜 화면 보는 기분으로 시작하시면 됩니다.

Q. 현직에 있을 때 봐도 효과가 있을까요?

있습니다. 오히려 더 필요할 수도 있어요. 저는 퇴직하고 나서 봤지만, 생각해보면 직장 다닐 때 이런 영화들을 알았더라면 좀 더 버틸 수 있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주말 저녁에 한 편, 아무 생각 없이 보는 것만으로도 다음 주를 버티는 힘이 생길 수 있습니다. 실제로 제 딸이 직장 다니면서 제 추천으로 몇 편 봤는데, 좋았다고 하더라고요.

Q. 일본 영화가 아니라 다른 나라 잔잔한 영화도 비슷한 효과가 있지 않나요?

그렇긴 한데, 제 경험으로는 일본 영화에 뭔가 특별한 게 있습니다. 정확히 설명하기 어렵지만, 공간을 다루는 방식이 다릅니다. 여백이 많고, 소리를 소리로 두는 느낌이 있고, 서두르지 않는 리듬 같은 게 있어요. 비슷한 잔잔함이어도 느껴지는 결이 다릅니다. 물론 이건 제 개인적인 느낌이라 다른 분들은 다를 수도 있습니다.

✍️ 마무리하며

저는 영화 전문가도 아니고, 평론가도 아닙니다. 그냥 30년 직장생활 마치고, 퇴직하고, 어떻게 살아야 하나 고민하다가 우연히 일본 영화를 만난 평범한 58세 남자입니다.

근데 그 영화들이 저한테 뭔가를 해줬습니다. 거창한 변화가 아니라, 그냥 하루하루를 좀 더 견딜 수 있게. 아침에 눈 떴을 때 오늘 저녁에 볼 영화가 있다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달랐습니다. 그게 작다면 작은 거지만, 저한테는 꽤 큰 것이었습니다.

직장 생활로 지쳐 있는 분들, 아니면 저처럼 퇴직하고 나서 허전함을 느끼는 분들한테 이 글이 조금이라도 닿았으면 좋겠습니다. 영화 한 편이 뭘 바꿔주진 않습니다. 근데 잠깐, 두 시간 정도, 마음이 숨을 쉴 수 있게 해줍니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할 때가 있습니다.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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